지난 6일 정부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 배상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3자 변제안’을 발표했다. 제3자 변제안은 일본 전범기업을 대신해 ‘한일청구권’의 수혜를 받은 국내 기업들이 일제강 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기금을 출연해 대납하는 방식의 배상안이다. 이에 윤석열 대통령(이하 윤 대통령)은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결단이다”고 말했지만 생존 피해자 전원은 이번 배상안에 대해 모두 반대 의사를 밝혔다. 지난 16일부터 17일까지 한일정상회담이 개최된 가운데 일제 강제동원 피해 배상안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강제동원 배상안의 배경△제3자 변제안의 명과 암△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알아보자.
◆강제동원 피해 배상안의 배경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은 일제가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위해 우리나라에서 △ 경제적△물적△인적 자원을 강제로 동원했던 정책이다. 또한 만주사변부터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시기에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 돼 △군인△군무원△노무자△위안부 등의 생활을 강요받은 자가 입은 △생명△신체△재산 등의 피해를 강제동원 피해로 규정한다.
강제동원 피해 배상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승소하면서 시작됐다. 지난 2018년 우리나라 대법원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4명이 신일철주금(현 일본제철) 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13년 만에 피해자의 손을 들어줬다. 이전까지 일 본은 지난 1965년에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을 근거로 원고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에 따라 일본 최고재판소도 지난 2003년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패소를 확정했다. 하지만 지난 2018년 대법원의 판결은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른 일제 강점기 시절의 손해배상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는 일본의 주장을 뒤집는 것이었다.
대법원 판결 이후 일본은 우리나라를 상대로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공정 과정에 이용되는 △포토레지스트△플루오린화 수소△플루오린 폴리 이미드의 수출을 규제하고 수출관리 우대 대상국 목록인 ‘화이트 리스트 (Whitelist)’에서 우리나라를 제외했다. 당시 일본은 이를 ‘안전보장상 대응’이 라고 설명했지만 우리나라 대법원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 손해배상청구 소송의 결과에 맞선 보복 조치로 해석됐다. 이에 지난 2019년 우리나라는 세계 무역기구(이하 WTO)에 일본을 제소했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를 통보했다. 최근까지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한 인적교류 단절 등으로 한일관계는 경색됐고 일제 강제동원 피해 배상 문제는 방치된 상황이었다.
지난 1월 우리나라 외교부가 국회에서 개최한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토론회’에서 강제동원 피해 배상 논의가 공식화됐다. 해당 토론회에서 강제동원 피해 보상을 민법상 제3자의 변제로 해결하는 방안이 논의됐다. 이에 따라 지난 6일 우리나라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행정안전부 산 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조성한 재원으로 판결금을 대신 변제하는 방안을 공식 발표했다. 재원은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자금 수혜를 받은 국내 기업이 자발적으로 재단에 기금을 출연하는 방식으로 마련된다. 실제로 수혜기업 중 하나인 포스코(POSCO)는 현재까지 재단에 총 100억 원을 출연했다. 한편 일각에선 이번 배상안에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국제 정치적 압력의 영향도 존재했다는 여론도 존재한다. 영국 BBC 뉴스는 우리 나라 정부의 이러한 행보가 △미국과 중국 간 관계 악화△북한의 안보 위협 심화△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신냉전 구도에서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 유지를 원하는 미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했다.
◆제3자 변제안의 명과 암
우리나라 정부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 배상안으로 제시한 제3자 변제안이 현 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방안이란 입장이다. 이전까지 우리나라는 일본이 배상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하지 못했다. 또한 생존 피해자의 대부분이 90대 전후의 고령이기에 시간을 더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한 끝에 일본의 배상을 온전히 받아내기가 쉽지 않으니 제3자 변제 방식으로 배상하는 방안을 선택 한 것이다. 지난 6일 박진 외교부 장관은 서울특별시 외교부 청사에서 이번 배상안에 관한 ‘대법원 판결 관련 정부입장’을 발표하며 “앞으로 한일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보다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켜 나가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다”며 “고령의 피해자 및 유족분들의 아픔과 상처가 조속히 치유될 수 있 도록 최대한 노력해 나갈 것이다”고 전했다.
이번 배상안으로 인해 한일 경제관계는 정상화 국면을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6일 배상안 발표 이후 일본은 수출규제 조치를 44개월 만에 해제 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우리나라 정부는 수출규제에 따른 WTO 제소 절차를 중단했다. 향후 지난 2019년부터 우리나라에 적용된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관련 3개 품목 수입의 불확실성이 해소되고 일본이 우리나라를 ‘화이트 리스트’에서 제외한 조치가 신속히 복구된다면 장기간 경색된 한일 경제관계가 정상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윤 대통령은 “양국의 산업 형태나 발전 방향 에 비추어 보완할 수 있는 게 매우 많다고 생각한다”며 “양국의 국익이 윈- 윈(win-win)할 수 있는 결정이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제3자 변제안은 생존 피해자들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은 방안이란 한계가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인 양금덕 씨(이하 양 씨)는 “제3자 변제안을 통한 돈은 절대 받지 않겠다”며 “잘못한 사람과 사죄할 사람이 따로 있는데 제3자 변제 방식으로 이를 해결해선 안 된다”고 비판했다. 지난 15일 양 씨 를 비롯한 다른 피해자 유족은 전범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의 국내 자산에 대한 추심금 소송을 제기했다. 이는 우리 기업이 일본을 대신해 배상을 진행 하겠다는 정부의 해법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다.
일본과 일본 전범기업의 사죄와 배상 등의 근본적인 책임이 결여된 배상안이란 허점도 존재한다. 허은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는 “윤 대통령이 일제의 침략 행위에 대해 일언반구도 비판하지 않는 데 이어 가해 기업에 면죄부를 주면서까지 추진하는 한일관계의 정상화란 도대체 무엇이며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고 비판했다. 과거 위안부 합의 땐 일본의 사죄가 존재했고 일본 정부 예산으로 10억 엔의 위안부 재단 출연금을 지급받았다. 그러나 이번 배상안은 일본과 일본 전범기업에 직접적으로 단 1엔의 지불 의무도 지우지 않는다.
윤 대통령도 사죄와 배상 참여 등 일본의 ‘호응 조치’는 거론하지 않았다. 또한 일본과 일본 전범기업은 우리나라 사법부의 판결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기에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직접적인 사죄와 배상이 이뤄지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지난 16일 열린 한일정상회담에서 강제동원 피해 제3자 변제안에 대한 일본의 호응 조치는 전무했다. 또한 한일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이하 기시다 총리)는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직접적인 사과 표현을 하지 않았다. 기시다 총리는 제3자 변제안에 대한 일본의 추가 호응 조치 계획을 묻는 질문에도 “앞으로 하나하나 구체적인 결과를 내고자 한다”며 즉답은 피했다. 이에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이번 배상안에 대해 “일본 피고 기업의 배상과 일본 정부의 직접적인 사과가 빠진 반쪽짜리 해결안이다”고 지적했다.
◆나아가야 할 방향
지난 2018년 대법원 판결을 통해 결정된 강제동원 피해 배상안은 일본 전범 기업의 국내 보유 자산 특별현금화(매각)를 통한 배상안이다. 이는 일본 전범기업의 재산을 매각해 배상하기에 일본 전범기업에게 일정 수준의 책임을 지울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방안이다. 그러나 당시 외교부는 우리나라가 일본 기업의 재산을 압류해 현금화하는 것은 상당한 외교적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이에 외교부는 일본 전범기업의 국내 보유 자산 매각에 대한 최종 판단을 미뤄달라는 취지의 의견서를 대법원에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이번 정부에선 이러한 외교적 부담을 초래하는 방안 대신에 제3자 변제안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재 정부가 발표한 제3자 변제안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 배상 관련 특별법 제정이 해결책으로 주목받는다. 심규선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이사장(이하 심 이사장) 은 “피해자들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할 방법은 특별법 제정이다”고 밝혔다. 심 이사장이 언급한 특별법은 문희상 전 국회의장(이하 문 전 국회의장) 이 지난 2019년에 대표 발의한 법안으로 우리나라 및 일본 양국의 기업과 개인 등의 기부금으로 기금을 마련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는 방안이다. 그러나 당시 이 법안은 우리나라 대법원 판결을 무력화시키는 법안이란 비판을 받아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았다. 한편 심 이사장은 특 별법 제정을 위해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내에 특별법 연구지원팀을 만들고자 예산을 배정했지만 상정된 관련 법안 대부분이 국회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되면서 실현 가능성은 작아졌다.
강제동원 피해 배상에 앞서 무엇보다도 일본과 일본 전범기업의 진정성 있는 사과가 우선돼야 할 것이다. 문 전 국회의장은 “재단에 의한 변제는 일본이 사과하고 용서를 빌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전했다. 이번 한일정상회 담에서 기시다 총리는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역사인식을 계승한다”고 밝혔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해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겼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이 이를 계승한다고 발표한 만큼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지난 1970년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서독 총리는 폴란드 유대인 위령탑 앞에 무릎을 꿇고 독일을 대표해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사죄했다. 이러한 독일의 뼈아픈 반성과 역사적 용기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세계 언론은 ‘무릎을 꿇은 것은 총리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다’고 할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편 지난 16일 한일정상회담에서 우리나라의 강제동원 피해 배상안에 대해 일본과 일본 전범기업은 어떠한 응답도 하지 않았다. 일본과 일본 전범기업의 근본적인 사죄와 배상이 없다면 이번 배상 안은 반쪽짜리에 불과한 해결책이 될 것이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 배상 문제 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모두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때다.
황동현 기자 06donghyun@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