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 11년 뒤에야 ‘여자 레이먼드 카버’라 불린 천재 단편소설 작가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루시아 벌린’이다. 1936년 알래스카에서 태어난 그녀는 광산업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미국 서부 지역과 칠레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녀는 다수의 연애와 세 번의 결혼을 통해 얻은 네 아들을 홀로 키웠다. 오랜 시간을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고 신체적으론 척추옆굽음증이 심해 말년엔 산소호흡기를 달고 살았다. 굴곡진 인생을 살다 2004년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책 ‘청소부 매뉴얼’은 일생 동안 그녀가 쓴 여러 단편의 일부를 골라 엮은 선집이다. 소설은 그녀가 겪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기 때문에 주인공의 이름은 계속 바뀌지만 전부 그녀의 이야기라 봐도 무방하다. 각 단편은 △소녀△젊은 여성△중년 여성의 시점으로 구성된다. 작품은 나이 순서대로 배치돼있진 않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주인공의 인생이 하나의 완성된 퍼즐처럼 완벽한 모양을 갖춘다.
이 책에선 루시아 벌린의 장기인 유머 감각이 여과 없이 발휘된다. 그녀는 △청소부△응급실 직원△전화 교환수△고등학교 선생님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또한 여러 단편을 통해 △가난한 생활△다수의 결혼과 이혼△알코올 중독 등 굴곡진 사건들로 가득했던 그녀의 삶을 특유의 유머 섞인 시선으로 풀어낸다. 그녀의 힘들지만 재치 있는 인생을 바라보며 독자 역시 힘겨운 인생 속에 조용히 숨어 있는 애틋한 순간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루시아 벌린은 사후 11년 뒤에야 조명된 불운한 작가다. 뒤늦게 조명된 명작에 △리디아 데이비스△조이스 캐럴오츠△토머스 맥구언 등의 소설가가 찬사를 바쳤고 우리나라에선 김연수 소설가와 박찬욱 영화감독이 그녀의 작품을 극찬했다. 슬픈 인생을 비참하게만 풀어내지 않고 유머와 함께 섞어 보석 같은 일상으로 세공한 청소부 매뉴얼을 읽으며 우리 각자의 삶 속에 숨어 있는 소중한 순간들을 발견하기 바란다.
장래산 기자 03raesan@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