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을 보고] 히로시마와 느베르 사이 겹쳐진 시간

등록일 2026년05월27일 01시10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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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히로시마에서 아무것도 안 보았어. 아무것도” “나는 모든 것을 보았어. 모든 것을”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은 이 짧은 대화를 통해 스스로의 방향성을 먼저 드러낸다. 영화의 시작에서 누군가는 히로시마를 기억한다고 말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결코 볼 수 없었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누구의 말이 옳은가가 아니다. 이는 처음부터 기억이라는 것이 완전한 재현도 망각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프랑스 감독 알랭 레네(Alain Resnais)는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과 한 여성의 사적인 기억을 포개 놓는다. 그 결과 영화는 전쟁을 직접 설명하기보다 시간이 인간 안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에 집중하게 된다. 영화는 히로시마에 머무는 프랑스 여배우와 일본인 남자의 만남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반전(反戰)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일본을 찾은 여자는 한 일본인 남자와 가까워지고 두 사람은 짧지만 강렬한 시간을 함께 보낸다. 그러던 중 남자는 여자에게 과거에 대해 묻고 여자는 프랑스의 작은 도시 느베르(Nevers)에서 있었던 기억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병사와 사랑에 빠졌지만 전쟁이 끝난 뒤 적국의 남자를 사랑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모욕과 폭력을 당했다. 연인이 죽은 뒤 그녀는 머리가 깎인 채 지하실에 감금됐고 오랜 시간 홀로 고통을 견뎌야 했다. 히로시마에서의 만남은 그녀가 묻어 뒀던 기억들을 다시 현재로 끌어올리고 영화는 현재의 히로시마와 과거의 느베르를 교차시키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이름 대신 ‘히로시마’와 ‘느베르’라고 부르며 헤어진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사건보다 시간을 보여주는 방식에 있다.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현재의 대화 속으로 과거의 이미지가 갑자기 스며들고 장면은 논리적인 순서보다 기억의 흐름을 따라 이어진다. 관객은 이야기의 원인과 결과를 따라가기보다 기억이 움직이는 방식을 체험하게 된다. 이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책 『시네마』에서 언급된 ‘시간-이미지’와도 연결된다. 들뢰즈는 현대 영화가 행동 중심의 서사를 넘어 시간 자체를 드러낼 수 있다고 설명한다. ‘히로시마 내 사랑’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경계를 끊임없이 흐트러뜨리며 관객이 시간의 감각 자체를 사유하도록 만든다. 영화 속 여성은 과거를 잊지 못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기억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녀의 첫사랑인 독일 병사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은 채 남아 있고 히로시마에서의 만남은 그 위에 또 다른 시간을 덧입히는 것이다. 영화는 기억이 단순히 오래도록 남아있거나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기억들과 겹쳐지고 변형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래서 『히로시마 내 사랑』은 단순히 전쟁 이후의 사랑을 다룬 영화로 남지 않는다. 이 작품은 영화가 철학을 설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철학적 사유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연속적 이미지△장면△침묵 반복은 단순한 연출 기법이 아니라 기억과 시간에 대한 질문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영화는 끝까지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장면과 장면 사이의 틈을 남겨 두고 관객 스스로 기억과 망각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히로시마 내 사랑』은 영화를 본다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시간을 통과하고 능동적으로 사유하는 경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서영 기자 12seoyoung@huf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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