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생산성본부는 산업계의 생산성 향상을 추진하며 우리나라의 경제발전 및 선진국 도약에 있어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기관이다. 현재 한국생산성본부에서 회장직을 맡고 있는 노규성 동문은 △선문대학교 교수△한국디지털 정책 학회 회장△혁신성장 추진 협의회 공동 수석대표△행정안전부 정부 혁신추진 협의회 디지털 혁신분과 위원장 등의 다양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현재 판소리 공연을 통해 글로벌 감성소통을 이끌어내며, 청년과 기업을 연결하고자 유튜브 채널을 열었다. 경영인이라면 △사명△신념△철학을 갖춰야하며 약자를 위해 함께해야한다는 신념을 펼치고 있는 노규성(경영·경영 80) 한국생산성본부 회장을 만나, 그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자세히 들어봤다.
Q1. 우리학교 경영학과에 진학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제가 중학교 2학년일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됐습니다. 지병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이웃집 농사와 바느질로 가계를 돕던 어머니가 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하셨는데, “은행에 갔으면 좋겠다”는 어머니의 바람을 따라 전주상고에 진학한 거죠. 고교 졸업 후 대신증권에 입사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일을 하면서도 지식에 대한 목마름이 컸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지식을 쌓고 체계적인 공부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그래서 4년 늦게 대학교에 진학하게 됐습니다. 영어를 포함한 외국어에 큰 강점을 가졌기에 많은 학교 중에서 우리학교를 선택했습니다. 또한 사회생활을 하면서 특히 경제와 기업에 대해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기에 경영학과에 진학했습니다.
Q2.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궁금합니다
대학교에 입학해 가톨릭 학생회인 세인트에 들어가게 됐어요. 당시 전두환 군부 정권을 반대하는 학생 시위와 5·18운동으로 학교 수업이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공부를 하고 싶어서 대학에 가긴 했지만, 막상 대학에 가니 학생운동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김병엽 신부님께 배운 사명감이 발동한 것일까요. 학생운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지명수배까지는 아니었지만 학생회 간부였기 때문에 붙잡히면 삼청교육대에 갈 판이었습니다. 제주도까지 도망을 가기도 했죠. 그 시기가 지난 후, 2학기에 복교가 돼 그때부터 학교를 다니게 됐습니다. 형편상 열심히 공부해 4년 동안 장학금을 받고 학교를 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이종욱 교수님께서 우리학교에 미래가 유망한 경영정보대학원이 생긴다며 그곳에 진학하는 것을 추천해주셔서 대학원에 진학하게 됐습니다. 우리 학교가 경영정보대학원을 처음 설립한 때였는데, 미국 보스턴대에서 경영학 교수를 하던 장유상 박사님이 초대 원장을 맡았죠. 장 원장님이 보스턴대 커리큘럼을 그대로 들여왔습니다. 정보라는 말은 정부에서나 쓰던 시절이라 생소한 분야였습니다. 지금 빅데이터와 디지털트랜스포메이션 확산에 큰 보람을 느끼고 열정을 다하게 되는 것을 보면 제게는 정말 잘 맞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대학원을 입학한 후 학생회장으로 당선돼 교수님들과 학생들의 소통의 창구 역할을 하며 학생 복지와 교육 시설 발전을 위해 힘썼습니다. 졸업쯤에 컨설팅 최고기관인 한국생산성본부에 취업해 2년간 일을 했어요. 80년대 생산성본부는 컨설팅 부문에서 국내 최고로 손꼽히던 기관이었는데 단 두 명의 경영정보 전문가를 뽑는 자리에 합격했죠. 생산성본부에서 일을 하다보니 기업에 경영정보 관련 자문을 하려면 현장을 더욱 잘 알 필요가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영정보의 기본은 현장 업무의 전산화인데, 아직 제 내공이 부족하다고 느꼈던 거죠. 마침 한국신용평가에서 데이터베이스(DB)를 다룰 경력자를 찾더군요. 이 곳에서 실무경험을 쌓으면서 박사과정을 시작했습니다. 가슴 한 켠에 남아있었던 교수라는 꿈을 이뤄야겠다는 생각이 컸기에 어려운 상황에서 일과 학습을 병행했어요.
학부 시절에 제가 봤던 대학은 시국으로 인해 항상 혼란했고, 학문적·이론적으로만 접근해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교수가 돼 현장감 있는 교육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매우 컸습니다. 업무와 학업을 동시에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결국 교수라는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학생들과 소통하며, 제가 기업에서 배웠던 다양한 현장지식과 실무적인 부분을 전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교육자로 일을 하면서도 디지털 정책 학회 활동을 하며 △학계△기업△정부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했어요. 그러다가 제가 한 모든 활동들이 계기가 돼 문재인 정부 인수위원회인 국정기획자문위원회에 참여해 우리나라 4차 산업혁명 정책을 설계하는 데에 일조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한국생산성본부에 다시 오게 됐습니다.
Q3. 한국생산성본부에 대해 간단히 소개 부탁드립니다
한국생산성본부는 산업계의 생산성 향상을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1957년 설립된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특별법인입니다. 6·25 전쟁 이후 나라가 폐허가 된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경제안정과 성장을 이끌 원동력을 생산성 운동에서 찾았으며, 이러한 생산성 운동을 이끌어 갈 중심체로 한국생산성본부가 만들어졌습니다. 국내 최초의 컨설팅·교육 전문기관으로 ‘경영’의 개념과 ‘컨설팅’을 보급했으며, △국가△기업△개인의 생산성 향상을 통해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한국생산성본부가 하는 일은 △컨설팅△교육△자격인증 사업으로 크게 나눠 볼 수 있습니다. 기업을 대상으론 △경영혁신△제조혁신△CS△지속가능경영 등 다양한 분야의 컨설팅을 하고 있으며, 재직자 대상으론 직무역량향상을 위한 다양한 교육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ITQ(정보기술자격)를 비롯한 8개의 국가공인 자격 등 산업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현장 중심의 실무형 자격을 개발·운영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하는 일은 사회적 가치 실현입니다. 한국생산성본부는 공공기관으로서 기업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우리나라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미션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경영환경이 어려운 중소기업을 돕고 어려운 청소년 대상 ‘비전스쿨’을 운영하는 등 사회적 약자를 도와주는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기업의 디지털트랜스포메이션 지원과 글로벌화입니다. 4차 산업혁명으로 기업을 둘러싼 경제·사회적 환경이 빠르게 변하는 상황 속에서, 스마트팩토리 도입 등 디지털트랜스포메이션을 통한 생산성 향상 지원 사업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KPC가 가진 컨설팅·교육 역량을 기반으로 해외 진출한 기업들을 돕고자 다양한 글로벌 사업도 최근 확대해 나가고 있습니다.
Q4. △대학교수△서울특별시 정보화전략위원회 의원△4차산업혁명위원회 위원 등 많은 일을 했는데 이를 가능하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나요?
선는 선천적으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가지고 태어난 것 같습니다. 어린시절의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자 열정적으로 도전하고 덤볐습니다. 후천적으로는 노력이에요. 체력을 갖추기 위해 운동도 많이 했고 실력을 쌓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핸드볼, 중학교 때는 축구 선수로 뛸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방황했던 시절에 김병엽 신부님께서 청년기엔 도전하고 사회 불의에 맞서며 약자들을 위한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셨어요. 김 신부님은 성당 앞을 지나가는 걸인에게 시계와 외투를 벗어주셨고, 오토바이 사고로 선종할 때는 가해자를 처벌하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의 분이셨습니다. 저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셨는데 만날 때마다 끊임없이 도전하라고 용기를 주셨죠. 신부님께 사회를 올바르게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배웠습니다. 항상 약자를 위하고 그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이 활발한 활동을 하는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은 대한민국이라는 미션을 갖고 있는 한국생산성본부에서 약자와 함께한다는 사명과 신념을 꽃피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Q5. 경영인으로 일하며 가장 인상 깊었던 때는 언제인가요?
가장 인상 깊었을 땐 인도 출장에 가서 강연을 하고 그 후 식사 자리에서 판소리를 했을 때예요. 제가 판소리를 하고 있는데 옆에 미닫이문이 조금 열리더니 외국인 여성이 제 노래를 들었어요. 그 후 저에게 한 곡 더 불러달라고 요청했고 판소리를 한 후에 저는 그 분을 포함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모여 함께 각자 자기 나라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때 마음과 노래는 어느 곳에서든 항상 통한다는 걸 느꼈어요. 흥부가의 돈타령, 춘향가의 사랑가 등 7~8개 레퍼토리가 있는데 외국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발표 영상을 만들고 노래 가사를 외국어로 바꿔서 판소리 공연을 하고 있어요. 외국인 손님들을 만날 때 소리를 들려주면 박수가 쏟아집니다. 그러고 나면 비즈니스가 일사천리로 진행되곤 해요. 아시아는 물론 유럽, 아프리카까지 통하는 걸 보면 △예술△문화의 힘△감성이 갖는 영향력은 정말 큰 것 같습니다. 경영에 예술을 접목해 사람의 마음을 얻어내고 사람들과 친밀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신뢰를 쌓으며 생산성이 배가 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해요.
Q6. 경영인이 갖춰야하는 자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사명△신념△철학을 갖춰야 하며 경영의 지혜 7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명 없이 경영을 한다는 것은 경영의 목표가 오로지 돈에만 있다는 것을 의미해요. 제대로 사명을 갖추고 일을 할 때 비로소 경영이 제대로 실현되며 그 후에 돈이 따라오게 됩니다. 신념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신념이 있어야만 열정을 쏟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는 △실용△혁신△민주 경영 철학을 가지고 일하고 있습니다. 실용 경영 철학을 통해 실질적인 이익을 내고 운영을 할 수 있고 혁신 경영을 통해선 빠르게 바뀌는 사회 속에서 적응할 수 있습니다. 또한 회사의 의사결정과정에 모두가 참여하게 해 성과를 만들어내는 민주 경영도 중요하죠.
경영인이 알아야 하는 경영의 지혜 7가지는 △인고의 지혜△적시의 지혜△득심의 지혜△경청의 지혜△선견의 지혜△축적의 지혜△도전의 지혜입니다. 이 지혜들의 각각의 뜻은 다음과 같아요. 포기하지 말고 참고 기다리며 한 길로 가면 결국 이뤄진다. 참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 사람의 마음을 얻지 않고 이룰 수 있는 것은 없다. 타인의 말을 들어야만 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고 그 마음은 결국 나에게도 온다.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면 그것에 대한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미리 변화를 감지해라. 계속해서 노하우와 기술을 축적시켜 나가야 한다. 시도하지 않고는 변화를 맞이할 수 없다. 이를 마음에 새겨놓는다면 참된 경영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Q7. 앞으로의 계획 및 목표는 무엇인가요?
우선 개인적으론 이번 달 10일에 노규성 TV 유튜브 채널을 열 예정입니다. CEO들과 청년들을 대상으로 기업의 경영에 대해 이야기하고 좋은 중소기업을 소개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청년들과 중소기업을 연결하고자 합니다.
기관 운영에 관해서는 한국생산성본부가 공적인 기관인 만큼 사회적 가치 실현에 앞장설 것입니다. 그 대상들은 △청소년△중소기업△신남방국가 등 해외 개발도상국이며 이들을 모두 포용해서 같이 앞으로 나아가는 역할을 하고자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중소기업이 굉장히 많습니다. 한국생산성본부는 이들이 발전해 강소기업을 넘어 대기업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사다리 역할을 해, 결과적으로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는 데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또한 좋은 중소기업 일자리와 창업 기회를 발굴해 청년들의 도전과 성공 확률을 높이는데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Q8. 경영인을 꿈꾸는 우리학교 학생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꿈과 열정을 가진 후, 신뢰와 융화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꿈은 자신의 바람직한 미래 모습을 그려서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미션이나 비전을 갖는 경영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꿈이 없는 사람들은 방향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꿈을 갖춘 다음에는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거나 잘할 수 있는 길에 열정을 다한다면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뢰와 융화를 갖추면 좋습니다. 혼자서 꿈을 이루려면 많은 힘이 들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 같이 가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뢰를 갖춘 후엔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경청을 통해서 사람들과 융화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네 가지를 갖춘 경영인이 되길 바랍니다.
김지수 기자 97didu@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