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복한 학생입니다”

등록일 2018년10월16일 13시48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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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유난히 설레 보이는 학생이 눈에 띄었다. 그는 바로 1975년 국가에 의해 학업이 중단됐다가 이번 해에 재입학한 이동석(서양어·프랑스어 73) 씨이다. 이동석씨는 “당시엔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했지만 삶의 해답을 찾기 위해 다시 학교로 돌아왔어요”라고 말했다. 아픈 기억은 접어두고 행복했던 청춘을 되찾으러 돌아온 이동석씨를 만나봤다

Q1. 학교에 돌아오시게 돼 감회가 새로우실 것 같습니다. 혹시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으신가요?

지난 1학기 프랑스어 전공 시간이었어요. 제가 73학번이다 보니 제일 먼저 출석이 불렸지요. 교수님께서 저를 보시더니 ‘왜 여기에 계시죠?’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셨어요. 그래서 프랑스어로 “저는 학생입니다”라고 대답했어요. 교수님께선 경칭 생략으로 출석을 부르시겠다고 하시곤 제 이름을 부르실 땐 “이동석 선생님”이라고 부르셨어요. 수업이 끝나고 교수님께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불러달라고 부탁드렸는데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답하셨어요(웃음).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실례라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이런 부분에서 배려해주시는 게 저로서는 참 감사해요.

Q2. 학교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 상황이 어땠나요?

일본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우리나라로 들어왔어요. 당시 우리나라는 긴급조치, 계엄령 등 정세가 불안했어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공부하겠다는 의지로 ‘서울대부속재외국민연구소’에 다녔어요. 그 다음 해인 1973년, 우리학교 프랑스어학과에 진학했어요. 하지만 행복한 학교생활을 하던 중 1975년에 학교를 그만 둘 수밖에 없었어요. 왜냐하면 그 해 11월 22일 박정희 정권에 의해 ‘재일교포유학생간첩단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죠. 저는 하숙집에 쳐들어온 보안사에 의해 연행돼 갖가지 고문을 당했어요. 결국 1976년 12월 저는 대법원에서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과 간첩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어요.
1980년 저는 석방됐고 다음 해에 일본으로 돌아갔어요. 복학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간첩으로 낙인찍혔기에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어요. 그렇게 일본에서 살아가다 노무현 정권 때 간첩죄에 관련해 재심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처음엔 어차피 일본에서 사는데 재심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생각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재일교포 가운데 박정희 정권부터 노태우 정권까지 우리나라에서 구속된 사람은 100명이 넘었어요. 그 사람들과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후 이들과 모여 2011년에 재심을 신청했고 2015년 9월에 무죄를 선고받았어요. 무죄 선고도 받았고 나라로부터 보상도 받았지만 가슴에 맺힌 한이 풀리지 않았어요. 국가가 보상금을 준다는 것은 과거로 돌아갈 순 없으니 국가의 잘못을 돈으로 계산한 것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어요. 이 한을 어떻게 풀면 좋을지 고민하던 중 ‘학교에 복학하는 게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학교에 재입학을 문의했고 가능하다는 대답을 들었어요. 그때의 행복을 잊을 수 없어요. 이후 학교에 복학했죠.
사실 이 나이에 다시 어학을 배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에요. 40년 이상 공부를 하지 않았기에 학교에 돌아오기 전에 프랑스로 6개월 정도 유학도 다녀왔어요. 아직도 어렵긴 하지만 가족들의 열렬한 지지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학교에 돌아올 수 있어 매우 감사해요.

Q3. 43년전엔 어떤 학교생활을 하셨나요?

학교생활의 대부분을 연극회에서 보냈어요. 원래 연극에 관심이 있었는데 마침 그때 연극회가 ‘욕망’이라는 연극 오디션을 진행한다고 했어요. ‘욕망’이라는 소설의 내용이 궁금해 헌책방에 가 일본어로 된 ‘욕망’책을 하나 사 읽어봤더니 마음에 쏙 들었어요. 그 길로 연극회에 지원하게 됐어요. 오디션을 보는데 노래를 하나 부르라고 했어요. 그래서 몇 알지 못하는 우리나라 노래 가운데 ‘봉선화’를 불렀지요. 사실 제가 아주 음치예요. 노래를 부르고 얼굴이 빨개져 “음치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하는 것은 실례예요!”라고 외쳤어요. 당시에 면접을 본 선배들이 좋게 봐주셨는지 연극회에 합격했어요. 연극회 친구들과 매일 오후 5시쯤부터 2,3시간 연습을 하고 함께 뒤풀이를 하며 친해졌어요. 그때는 재일교포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어요.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있어 돈을 낭비하고 나쁜 짓을 일삼는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연극회 부원들은 그런 편견이 없었어요. 학교를 떠나기 전까지 함께 여행도 가고 매우 즐겁게 지냈어요. 행복한 추억이 많아요.

Q4. 어쩌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게 됐나요?

고등학교 3학년 재학 시절, 학교에 북한계 조선학교 견학 포스터가 붙은 것을 봤어요. 부모님께는 비밀로 하고 견학을 갔어요. 그러던 중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일본 학교를 다니며 한국 이름을 사용하던 재일교포 학생을 만났어요. 당시 대부분의 재일교포 학생들은 일본 이름을 사용하며 일본인인척 했어요, 그 학생과 대화를 나누며 가치관이 많이 바뀌었어요. 이후 우리나라 역사를 배우고 우리나라에 대해 공부하다 보니 한국어를 공부하고 싶었지요. 그것이 바로 나의 정체성을 찾는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Q5. 앞으로의 목표가 어떻게 되세요?

도쿄에 2살 된 손자가 있어요. 손자가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대학을 졸업하고 싶어요. 처음에는 2년 안에 졸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난 학기에 17학점을 들어보니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학기엔 교양과목을 들으며 15학점을 듣기로 했어요. 관심이 있는 것을 배우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한국 문학’과 ‘한국 현대사’ 과목을 골랐어요. 또 비교적으로 배우기 쉬운 일본 문학 관련 수업을 선택했는데 상당히 수준이 높아 힘이 드네요(웃음). 그래서 다음 학기엔 10학점 이하로 신청할 예정이에요. 졸업하는데 3년이 걸리면 어떻고, 4년이 걸리면 어때요. 저는 우리나라에서 생활하고 학교를 다니는 삶이 즐거워요. 당분간은 천천히 학교를 다니며 지금을 즐기고 싶어요. 졸업을 한 후엔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제가 일본에서 지낼 때 사회복지 관련 일을 했어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일해보고 싶어요. 앞으로 학교를 다니며 더 생각해 볼 예정이에요.

Q6. 후배들에게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요즘 학생들은 예전에 비해 학생들끼리 돕거나 재밌게 지내는 분위기가 없어진 것 같아요. 사회적 구조와 분위기가 변화했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학생들이 많은 호기심을 갖고, 여러 방면에서 경험을 했으면 좋겠어요.
젊었을 때 실패하는 것은 실패한 게 아니에요. 저 또한 피치 못할 사정으로 5년간 공백이 있었지만 그것으로 제 인생이 실패했다고 볼 순 없어요. 그 일 덕분에 느낀 것도 많고 얻은 것도 많아요. 인생을 길게 생각하면 실패한 것 또한 경험이고 경험을 살리려고 노력하면 돼요. 그러다 보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어요. 학생들이 원하는 삶을 살았으면 해요.


윤아영 기자 97yyuna0@huf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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