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중(영어·서양어 82) 동문은 △오사카·미얀마·뉴욕 지부 영사△페루·싱가포르 지부 공사참사관△로스앤젤레스 지부 총영사△기획조정실장을 거쳐 지난해 11월 재외동포영사실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30년간 외교관으로서 세계 각국과 우리나라와의 협력 관계 형성을 위해 힘을 기울였다. 외교 현장의 최전선에서 우리나라와 세계를 이어온 김완중 동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Q1. 우리학교에 입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외교관을 꿈꿨습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고민하던 중 우연히 본 신문을 통해 1981년 당시 우리학교가 가장 많은 외교관을 배출했단 사실을 접했죠. 그 후 외교관이 되기 위해 우리학교에 진학해야겠단 결심을 했습니다.
Q2. 기억에 남는 대학 시절 활동이 있나요?
대학 시절에 참여한 민주화 운동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1987년에 6·10 민주항쟁이 일어난 후 우리학교 인근에 위치한 △고려대학교△경희대학교△서울시립대학교 학생과의 데모가 자주 진행됐어요. 제대한 동기는 군복을 입고 군인과 직접 대치했죠. 저 역시 학우와 함께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민주주의가 시작되는 현장에 서 있었단 생각에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또렷합니다. 이외에도 주말마다 △사법고시반△외무고시반△행정고시반 학우와 함께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며 시간을 보냈어요. 이 활동을 통해 공부를 위한 체력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
Q3. 외교관을 꿈꾸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대학에 입학한 후 전공에 재미를 붙이지 못해 명확한 목표 없이 방황했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순 없단 생각에 카투사 시험을 보고 군에 입대한 것이 삶의 반환점이 됐죠. 군 시절 미군과 함께 생활하며 당시 △경제적△군사적△지정학적 약소민족이던 우리나라의 세계적 위치를 깨닫고 외교의 중요성을 느꼈어요. 이때를 계기로 제대 후 외무고시반에 들어가 외교관의 꿈을 이루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Q3-1. 외무고시에 합격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우리학교 외무고시반과 학교 수업의 도움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외무고시반엔 외무고시에 합격한 수많은 동문이 후배를 위해 남겨놓은 각 과목별 요약본이 존재하죠. 요약본을 통해 △국제경제△국제법△외교 안보 등 다양한 과목을 쉽게 공부했습니다. 또한 외무고시반에서 정기적으로 진행한 모의 외무고시도 큰 도움이 됐죠. 전 영어학 전공자였지만 정치외교학과의 수업을 들을 수 있었어요. 정치외교학과의 △국제정세△국제법△헌법 강의는 외무고시의 시험 범위에 속했기에 3학년 때 열심히 학교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Q4. 외교부에 입사한 후 약 30년간 △미국△일본△미얀마△페루△싱가포르 등 다양한 국가에서 근무하셨습니다. 각 국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이 궁금합니다.
국가마다 장점이 뚜렷해 모든 국가에서 즐겁게 근무할 수 있었습니다. 외교관 임기 초반에 근무했던 미국과 일본에선 세계 경제의 흐름을 읽는 법을 배웠죠. 두 국가 모두 세계 경제의 중심지로 다양한 국가의 기업이 투자하러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미얀마와 페루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자원이 있는 국가이기 때문에 자원외교를 중점적으로 진행했어요. △두 국가의 석유 및 천연가스△미얀마의 원목△페루의 농산물 등 다양한 자원에 주목하며 우리나라와의 교역 품목을 늘리고자 노력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싱가포르는 지리·경제적으로 동남아시아의 중심에 위치해 동남아시아 10개국 전체의 무역 현장을 체험할 수 있었죠. 현지 경제 신문을 구독하고 싱가포르 시내의 경제 연구소에서 열린 강연도 청강하며 열심히 공부했어요. 이때의 경험이 외교관으로서 전략적 사고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Q4-1. 오랜 외교관 생활 중 가장 보람찼던 순간이 궁금합니다.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됐던 ‘제미니 호’ 소속의 우리나라 선원을 무사히 구출한 순간이 기억에 남습니다. 2012년 소말리아 해적들이 제미니 호에 있던 우리나라 선원 4명을 납치하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싱가포르 총영사로서 현지 선사와 4개월간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석방을 위한 협상을 진행했죠. 선원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교섭을 진행했고 4명 모두 무사히 구출됐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진행됐던 협상이었지만 외교관으로서 국민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어서 큰 보람을 느꼈죠.
Q4-2. 외교관 생활을 하며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역사와 얽힌 문제에서 외교를 진행해야 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일본에서 근무할 당시 △국군 포로△독도△위안부 및 강제 노역 등 양 국가 간의 민감한 사항에 대해 논의하며 고충을 느꼈죠. 최근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독립운동가의 자손이 제도적 문제로 우리나라의 국적을 얻지 못해 슬퍼하는 모습을 보며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역사의 피해자로 존재하는 우리 국민이 조금이라도 보호받기 위해선 국가적 차원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계기가 됐어요.
Q5. 재외동포를 위해 △세계 한인의 날 행사 마련△청소년 재외동포 장학제도△한국학교·한글학교 지원 등 다양한 사업을 총괄 중이십니다. 이것 외에 재외동포영사실장으로서 하는 업무는 무엇이 있나요? 전 세계엔 750만 재외동포가 존재합니다. 이들 모두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이 근본적인 업무에요. 현지의 영사관 및 지원 시설을 이용해 전 세계에서 ‘해외안전지킴센터’를 상시 운영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이 주재국에서 차별받지 않도록 복지 및 교육의 측면에서 영사관 내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한인사회 구축을 돕는 등 다양한 정책을 시행 중입니다. 또한 해외에서 △자연재해△전염병△전쟁 등의 재난이 발생했을 때 우리나라 국민을 구출하는 임무를 총괄하기도 하죠. 최근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대립이 심화되자 우크라이나 현지의 우리나라 교민이 귀환하도록 송환조치를 도왔습니다.
Q5-1. 지난해 12월 외교부의 ‘2021 재외동포현황’에 따르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의 영향으로 16만 8천여 명의 재외동포가 줄어드는 등 해외에 거주하는 국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진행 중인 사업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현재 △응급키트 지원△신속통로 정책△전세기 제공 등을 시행 중입니다. 2020년부터 이번 해까지 총 3년 동안 모든 재외동포의 안전을 위해 마스크 및 응급키트를 각 국가의 공관에 제공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다른 나라와 무역 사업을 진행 중이던 국민이 입국 봉쇄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존재해요. 이 경우 사업을 하는 국민에 한해 예외적 입국이 가능한 ‘신속 통로’ 정책을 마련했습니다. 이외에 현지에서 우리나라로 입국하겠단 의사를 밝힌 국민은 전세기 및 선박을 통해 복귀시키고 있죠. 현지 생활 중 코로나19에 걸린 국민은 현지의 병원과 협업해 지원하고 있어요.
Q6. 외교관이 갖춰야 할 덕목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타인에 대한 배려가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모든 외교는 거래의 형식으로 이뤄집니다. 성공적인 거래를 이루기 위해선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것이 중요하죠. 열린 귀를 갖고 다른 나라의 입장을 배려한다면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또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데 거리낌이 없어야 해요. 현지 사회와 구성원에게 먼저 다가가며 끊임없이 소통해야 합니다.
Q7. 지난해 2월 본인의 에세이집 ‘나성에 가면’이 출간됐습니다. 책을 집필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총영사로 일하며 한국전쟁 이후 미국에 입양된 우리나라 사람이 양 국가의 시민권을 얻지 못해 슬픔을 겪는 경우를 여럿 봤어요. 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했지만 △경제적 문제△국제법 및 국가법△병역 문제 등 다양한 사항이 얽혀있어 해결이 쉽지 않았죠. 두 나라에서 도움받지 못하는 한인을 보며 외교관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단 생각에 좌절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외교관으로서 이런 아픔도 하나의 역사로 기억하기 위해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결심했어요.
Q8. 외교관을 꿈꾸는 우리학교 후배들에게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두드리면 문은 열린다’고 당부하고 싶어요. 외교관이란 목표를 두고 좌절할 때도 많겠지만 계속해서 도전한다면 반드시 성공하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다양한 국가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단순히 특정 국가만 선호하는 것은 본인이 성장할 기회를 저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세계 어디든 기회의 땅이 될 수 있어요. 열린 마음으로 현지에 다가가면 얻을 수 있는 경험이 배가 되죠. 두려워 말고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김하형 기자 03hahyung@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