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지 않게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서로에 대한 손가락질이 한창이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상대방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은 유년기 때부터 끊임없이 들어온 일종의 규범이지만 이를 실생활에 적용하는 것은 인류에겐 아직 요원한 일인 것 같다.
과거부터 개인의 ‘성장’ 방법을 두고 현자들이 치열한 논쟁을 벌인 바 있으나 결국 누구의 이론도 우위를 점하지 못한채 오늘날까지 흘러왔다. 그들의 진리 탐구적 사고 과정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내가 ‘성장’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어불성설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감히 개인적인 의견을 밝혀보자면 성장은 곧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성장은 비판을 먹고 자란다. 스스로의 단점을 잘 깨우치고 뉘우치는 특별한 인물을 가정하지 않는 한 대다수는 자신의 실제 모습을 보지 못한다. 이때의 실제 모습이란 본인이 남에게 보이고자 하는 외양뿐만 아니라 보이고 싶지 않은 내면을 포함한다. △술을 먹으면 난폭해지는 사람△앞에서는 모두를 이해해주는 척 하지만 뒤에서는 험담을 서슴치 않는 사람△온정을 베푸는 듯 보이지만 정작 자신의 이익은 한치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 등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추한 모습을 가리기 위해 착용한 가면은 언젠가 그 수명을 다하기 마련이다. 완벽한 연기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으므로 결국 임의의 시점에 임의의 개인에 의해 본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추함을 완벽하게 가려주던 가면이 깨지고 주변 사람들이 그의 실체를 알기 시작할 때 비판이라는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한다. 여기서 개인의 선택지는 단 두 가지이다. 날아오는 화살을 겸허히 받아들이던가 아니면 이를 회피하는 것이다. 회피하는 자를 생각해보자. 그는 비판을 받진 않았지만 본인의 약점을 평생 노출한 채로 살아가며 고통을 모르기에 이를 고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저 계속 회피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화살을 온몸으로 견딘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상처가 난다. 그러나 상처는 아무는 것이다. 회복 과정에서 이전보다 단단해진 부위는 이제 자신의 약점이 아니기에 가면으로 보호할 필요조차 없다. 당당해지는 것이다. 당장의 고통은 피했으나 평생 가면을 쓰고 도망다니는 사람보다 겸허히 비판의 화살을 받아들인 사람만이 ‘성장’이란 이득을 얻는다.
결국 개인의 성장을 위해 비판을 수용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인 것이다. 자신을 향한 비판을 수용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연륜과 경험에 상관없이 하나의 개체로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고자 하는 모습은 고대부터 이어온 인간의 본모습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소한 상대방의 의견을 듣고 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이어질 때 우린 최상의 상태에 도달하지는 못하더라도 그에 근접해진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어지러운 세상 속에 나는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진다. 당신들은 스스로 비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 당신들은 스스로 성장할 준비가 되었는가.
이승원(외대학보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