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번역으로 삶을 풀어내는 정은귀 교수를 만나다

등록일 2025년09월18일 00시14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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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귀 우리학교 교수(영어 89)는 우리학교 영어과를 졸업한 후 현재 △영미시 번역가△우리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작가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정은귀 교수는 영미문학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꾸준히 저술과 번역문을 발표하고 학문적 탐구와 창작의 경계를 넘나들며 학생들과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그녀의 주요 논문으론 ‘루이즈 글릭()과 서정시의 귀환: <입장료 1달러 시>의 수행성 다시 생각하기’가 있으며 현재까지 그녀가 번역한 한영 및 영한 시집은 총 20권에 달한다. 학문과 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정은귀 교수를 만나보자.

 

 

Q1. 우리학교 영어과에 입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원래 서울대학교(이하 서울대) 국문과에 진학해 시인이 되고 싶었으나 서울대 진학에 실패했습니다. 이후 후기 대학 중 가장 좋은 대학이 우리학교 영어과였기에 우리학교 영어과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사실 국문학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우리학교엔 국문과가 없어 전통적으로 가장 좋은 과였던 영어과를 선택했습니다. 많은 일들이 우연으로 결정되는데 지금은 우리학교 영어과를 나온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Q2. 우리학교 재학시절 어떤 학생이었나요?

대학 시절엔 흔히 말하는 공부 벌레였습니다. 우리학교 영어과에서 제공하는 수업이 너무 재밌어 도서관에서 살았어요. 당시엔 지방에선 영어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 수업에서 영어를 새롭게 배우는 과정이 재밌었습니다. 학교 수업만 들어도 영어 △듣기△말하기△읽기 실력이 향상되는 게 즐거웠습니다. 학부 때 영문학의 세계에 눈을 떠 대학원 진학을 비교적 일찍 다짐했어요. 

 

Q3. 재학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무엇인가요?

아주 특별한 경험은 아니지만 도서관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저는 학교생활을 하며 주로 도서관에 많이 갔어요. 우리학교는 다른 학교에 비해 캠퍼스가 작다 보니 자주 다니는 길에서 마주친 낯선 타과 학생들의 얼굴도 되게 친숙하게 느껴져요. 그래서 도서관과 강의실을 오가는 길에 낯익은 학생들을 만나면 반가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Q4. 영미문학과 문화 연구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우리학교 영어과는 주로 어학과 문학을 고루 가르쳤습니다. 영문학을 공부하다 보니 굉장히 재밌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계속 1등을 하기도 했죠. 당시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져 장학금이 절실해 열심히 공부해 성적이 잘 나왔고 이 성적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싶어 학업에 더욱 열중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영문학의 세계에 눈을 떴습니다. 특히 故 이영걸 교수님의 영시 수업이 좋았어요.

 

Q4-1. 문학의 여러 갈래 중 시를 선택해 연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국민학교 때부터 시를 좋아해 시를 즐겨 외웠고 시인으로 사는 게 꿈이었어요. 故 이영걸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며 영시가 좋아졌고 본격적으로 ‘계속 공부를 해야지’란 다짐을 한 건 4학년 때였습니다. 특별히 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짧지만 그 안에 모든 게 다 담겨 있어요. 짧은 글 안에 △문화△시대적인 감성△역사를 함축적으로 제시해 독자들에게 △공감△비판적 통찰력△위로을 함께 전하는 것이 시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Q5. 번역가로 활동하며 기억에 남는 특별한 경험이 있나요?

저는 시를 번역할 때 양방향 번역을 합니다. 양방향 번역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제가 더 주목받는 것 같기도 해요. 다양한 시인들을 만날 때마다 매번 깊이 몰입해 제가 그 시인이 되는 것 같아요. 앤 섹스턴(Anne Sexton)의 시를 번역할 땐 제가년대 미국인의 삶을 살아낸 여성 시인이 되고 19세기 빅토리아조 영국 시인 크리스티나 로제티(Christina Rossetti) 시를 번역할 땐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망명해 시인이 되기만을 꿈꿨던 문학을 좋아하는 가문의 막내딸이 된 것 같습니다. 남성 시인을 번역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를 예로 들면 그는 의사인 동시에 시인이었습니다. 때문에 그의 시를 번역할 땐 대공황기의 뉴욕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의사이자 시인이 됩니다. 이렇게 번역을 하며 다른 사람이 돼가는 과정이 짜릿하고 좋습니다. 번역하기 전 시인이 살아온 과정을 돌아보고 제가 그 시인의 삶을 대신 사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기쁨△슬픔△쓰라림△아픔 등의 다채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Q5-1. 번역 과정에서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순간과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번역은 항상 어려운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한국인이다 보니 “영어에서 한국어로 옮길 때가 더 쉽지 않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국어에서 영어로 옮길 때나 영어에서 한국어로 옮길 때나 어려움은 똑같은 것 같아요.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오래 생각하기’입니다. 하루 종일 해결하지 못한 것들을 밤낮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시를 번역할 때 생각나는 일화가 있습니다. 윌리엄은 실험적인 시를 많이 썼기 때문에 그의 시는 행간이 끊겨 있기도 하고 어떤 행은 갑자기 들여쓰기도 합니다. 스탠자(Stanza)의 위치와 구분이 굉장히 중요하죠. 이를 번역할 때도 최대한 반영해야 합니다. 그러나 영어와 한국어는 어순이 다르기에 완벽히 똑같이 번역할 수는 없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생각해요. 마치 수를 놓듯 짜 맞추기를 계속하는 거죠. 윌리엄 카를로스의 시의 경우 계속 고민하다 운전하던 중 좋은 배열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운전하며 손등에 떠오른 생각을 써놓고 반영한 적도 있어요.

 

Q5-2. 번역은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지나요?

저는 주로 출판사에서 요청이 먼저 오는 편입니다. 출판사에서 번역 요청이 오면 제가 영시를 전공해 좋은 시인을 많이 알고 있어 다양한 시인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경우는 샘플(Sample) 번역을 통해 출판사를 찾아야 할 때도 있어요. 계약을 맺고 나면 번역가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실함입니다. 일정한 시간에 번역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야 해요. 끊없이 틈입하는 여러 가지 다른 일 사이에서 번역가로서의 호흡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주로 아침에 번역을 합니다. 오전 4시 반부터 8시까지 집중적으로 번역을 해요. 단번에 만족스런 번역이 나오는 것이 아니기에 부지런하게 생각하며 계속해서 수정 작업도 합니다.

 

Q6. 직접 작품을 집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저는 원래 교수이자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작가이자 번역가로서의 개성이 생겼더라고요. 처음부터 ‘책을 내야 되겠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한 신문사에서 시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칼럼(Column)을 쓰고 있었는데 제 글을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생겼습니다. 이후 독자들이 많아지다 보니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는 제안이 왔어요. 제가 지금까지 집필한 산문집이 4권이고 번역서는 약 35권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게 출판할 가치가 있는 책인가’ 매번 고민합니다. 제 책을 좋아해 주는 독자들이 있어 그 힘으로 계속해서 책을 낼 수 있는 것 같아요.

 

Q7. 작가로서 꼭 전하고 싶은 가치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말에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제가 하는 △글쓰기△문학 공부△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말의 힘입니다. 어떤 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대개 △배제△소외△증오△혐오의 말이 그렇죠. 저는 반대로 사람을 구하는 말들이 있고 그런 말들이 모여 좋은 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장르를 불문하고 사람을 구하는 말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도 미약하게나마 그 몫의 일부분을 감당하고 싶어요. 여러 글 중에서도 가장 순도 높게 사람을 구하는 말의 언어는 시란 믿음이 있습니다. 제 연구의 길은 그 가치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Q8. 앞으로의 계획 또는 이루고 싶은 꿈이 궁금합니다.  

이번 해 가을에 ‘번역가의 단어’란 책이 나올 예정이고 미국 시인 로버트 크릴리(Robert Creely) 시집도 곧 나올 예정이에요. 가치가 혼돈되고 매우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에서 학생들에게 인문학을 통한 배움이나 사유의 중요성을 전달하는 일이 행복해요. 어떤 이들은 인문학이 쓸모 없다고 하지만 저는 앞으로 인문학의 가치가 더 중요한 시대가 올 것 같습니다. 생각하고 질문하는 힘을 길러주니까요. 그래서 앞으로도 말의 힘을 전하며 사람을 살리는 말을 만들고 엮는 사람이 돼 학생들에게도 제가 시를 통해 얻는 힘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Q9. 마지막으로 우리학교 후배들에게 조언 부탁드립니다.

입시의 측면에서 ‘최고의 학부’에 진학하지 못했단 쓰라린 상실감을 안고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학교는 훌륭한 세계시민이 될 수 있는 가장 좋은 터 같아요. 다양한 융복합 학문을 공부할 수 있고 외국인도 많이 만나며 다름을 알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때문이죠. 학생들이 겸손하고 착해 자신이 가진 잠재력과 가능성이 얼마나 큰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자기 안에 쉼 없이 자라고 있는 미래의 나를 크고 단단하게 그려보며 오늘을 기쁘게 살기를 당부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어가는(Becoming) 존재’거든요. 그 힘을 믿으세요.

 

 

김민서 기자 09kimminseo@huf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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