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첫 문장이 아니었다면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내지 못했 을 거다. ‘설국’의 첫대목은 독자에게 이 소설을 어떻게 읽어나가야 할지 알려준다. 우리는 설국을 ‘읽는 것’ 보다 ‘보는 것’으로 대해야 한다. 보통의 책처럼 줄거리를 따라가며 읽는 독법은 이 책에선 통하지 않는다. 작 가의 문장을 마치 그림 그리 듯이 이미지화해야 하며 그렇게 책을 다 읽고 나면 마음속에 글이 아닌 그림이 남게 된다.
이 책의 저자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 康成)(이하 야스나리)’는 1899년 오사카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야스나리는 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다음 해에 어머니마저 잃는다. 한순간에 부모님 을 잃은 야스나리는 조부모님의 손길 아래 자란다. 그러나 7세에 조모를 잃고 15세에 조부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외로운 유년 시절을 보낸다. 어린 시절부터 여러 번의 죽음을 마주해야 했던 야스나리는 고독과 허무 의식에 빠진 삶을 살았으며 이는 그의 작품 세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68년 일본에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설국’은 야스나리가 니가타현(新潟県)에 직접 머물며 집필한 책이다. 처음부터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쓰인 것이 아닌 연작의 형태로 9편의 단편을 모아 소설로 출간했다. 책의 주인공 ‘시마무라’는 부모님의 유산 덕분에 편안한 삶을 살아가는 30대 중반의 남성이다. 그는 서양 무용에 관한 연구를 하며 이따금 시골 마을로 여행을 떠난다. 시 마무라는 여행 도중 두 명의 여자 ‘고마코’와 ‘요코’를 만나게 된다. 고마코는 죽음을 앞둔 약혼자를 위해 기생이 되기로 자처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시마무라는 이런 고마코의 노력이 모두 헛수고라고 생각한다. 또한 아픈 이의 곁을 지키며 간호하는 요코의 행위도 그의 눈엔 순수하고 무결하나 결국은 허무한 일로 비춰질 뿐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헤매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내 삶에도 허무한 일에 마음을 쏟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언젠가 누가 내게 허무한 일에 시간을 낭비해보고 싶어 외대학보에 들어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이 당시엔 이해되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이제는 무슨 말인지 조금은 알 듯하다. 비록 난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책을 읽었지만 당신은 눈이 내려 온 세상이 하얗게만 느껴질 때 설국을 읽어보길 바란다.
양진하 기자 04jinha@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