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지난해 7월 달력은 인도네시아 하계 연수기로 채워져 있다. 이때뿐이었다. 난 스물셋의 나이임에도 집을 5일 이상 떠난 적이 없었다. 기숙사 역시 살아본 적 없는 난 그저 집을 사랑하고 고향에서 멀어지지 않는 토박이 생활 중이었다. 12년째 이사 없이 정착한 아파트에서 초등학교부터 대학교 생활까지 이어가고 있지만 정작 내 마음의 정처는 없었다.
우리 학과는 매년 여름방학마다 인도네시아의 족자카르타(Yogyakarta)에 위치한 가자마자 대학교(Universitas Gadjah Mada)에서 열리는 방학 연수를 진행했다. 나는 그 기회를 권태롭던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오아시스로 보았고 부모님은 지쳐 있던 날 보며 인도네시아로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36일 동안의 인도네시아 생활은 두렵기도 했지만 두근거렸다. 원치 않았던 사건이 벌어지고 내 마음도 안정감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검은 캔버스에 지핀 붉은 노래를 들으며 캠퍼스의 밤길을 걸었다. 그것은 내 일을 견딜 수 있는 나만의 생존법이었다.
그곳에선 고독을 찾아다녔지만 행복은 함께일 때 피어났다. 평소 밴드(Band)를 좋아하는 나는 현지 대학생 친구와 ‘ALVF’ 합주실에서 영국 밴드 오아시스(Oasis)의 ‘Don’t look back in anger’를 합주했다. 우리는 한국과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음식인 김치와 나시고랭(Nasi Goreng)을 합쳐 ‘김치GORENG’이라는 밴드를 결성했다.
나의 인도네시아 이름도 생겼다. 내 튜터링(Tutoring) 친구는 한자의 뜻과 음을 담은 우리나라의 작명 문화가 신기하다고 했다. 내 이름 ‘소영(韶瑩)’은 아름답고 밝은 뜻을 가졌다고 그에게 알려주자 나는 ‘행복하고 아름답다’ 란 의미를 품은 ‘Fara’가 되었다. 나는 답례로 그 친구에게 ‘상아’라는 한국어 이름을 지어줬다. 전설 문화가 유명한 인도네시아에서 달을 뜻하는 상아는 최적의 이름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움과 달빛이 오가는 호명 속 행복이 있었다.
나는 상아와의 마지막 만남에 꽃집을 방문했다. 내가 원한 꽃다발의 구성은 다섯 송이였지만 소통의 오류로 다섯 꽃다발을 대량 구매해 버렸다. 다섯 꽃다발이 담긴 쇼핑백을 들고 한 사람을 기다렸다. 우리의 약속 장소는 인도네시아의 하얗고 빨간 국기가 빼곡히 걸린 거리였다.
나의 하계 연수기도 이와 같은 색깔을 띠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던 하얀 캔버스에 사랑의 마음이 지나갔다. 내게 다시는 흉내 낼 수 없는 추억을 안겨준 ‘비빌 언덕’이 있었고 그에게 평생 새겨둘 고마운 마음을 추신한다. 내 오아시스는 너였다고.
되돌아갈 수 없지만 새로이 가볼 수 있는 족자카르타(Yogyakarta). 나는 다시금 떠날 용기를 지피다가 껐다를 반복하는 20대 초반의 마지막 겨울을 걷고 있다.
유소영(통번역마인어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