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아가다 보면 갖가지 상처를 받아 자연스레 내면에 생채기가 나기 마련이다. 이때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내면의 아픔을 극복하려 시도하거나 방치한 채 슬픔을 심화시키기도 한다. 상처 를 치유하는 과정에선 인간의 반사회적 혹은 예술적인 면모가 부각되는 등 다양한 모습이 관찰된다.
요시모토 바나나(吉本ばなな)의 ‘키친’은 세 개의 단편으로 이뤄져 있지만 다양한 사연을 지닌 주인공들의 상처가 기워진다는 하나의 관통된 주제가 드러난다. 세 단편 중 ‘키친’과 ‘만월’에선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그동안 자신을 돌봐주신 조부모마저 세상을 떠나며 핏줄 하나 없이 홀로 남겨진 ‘미카게’가 등장한다. 미카게는 끝없는 암울 속에 사로잡혀 무기력하게 부엌에 누워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그러다 미카게는 운명적으로 그녀의 할머니가 생전에 자주 들르던 꽃집에서 일하는 청년인 ‘유이치’의 권유로 함께 살게 된다. 미카게는 유이치 그리고 실질적으론 유이치의 아버지지만 그의 어머니가 죽은 후 어머니의 역할을 도맡아 하기 위해 성전환 수술을 감행한 ‘에리코’와 함께 살아가면서 내면의 상처를 보듬어 간다. 하지만 에리코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유이치는 미카게와 비슷한 처지에 처하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남겨진 서로의 아픔과 상실감을 공유하며 치유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유이치와 미카게는 따스한 관계 속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곪아있던 마음의 상처를 회복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 단편인 ‘달빛 그림자’에 등장하는 ‘사츠키’와 ‘히토시’는 4년에 걸쳐 연애한 연인 사이다. 그러나 히토시가 교통사고로 인해 돌연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츠키는 내면의 고통을 외면한 채 살 아가려 하지만 히토시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늘 괴로워한다. 우연히 ‘우라라’라는 인물의 도움을 통해 죽은 히토시와 극적으로 대면할 수 있게 된 사츠키는 히토시에게 영원한 작별을 고하고 내면의 상처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내면의 상처에 대한 치유와 구원에 도달하기 위해선 각자의 방식이 존재하겠지만 작가는 극복 의지를 가질 수 있는 용기에 주목한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이를 감내하려 하며 오히려 초연한 면모를 보여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담담함 속에서 아련하게 드러나는 슬픔은 그 비극성을 더욱 증폭시킨다. 그들의 깊숙한 내면의 아픔을 꺼내 마음껏 슬퍼하며 극복하려는 의지가 나타날 때 그들은 비로소 성장할 수 있게 된다. 작가는 극복과 성장이 희망과 가능성의 전부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또한 이 작품엔 죽음이라는 요소가 가미돼 익숙해서 잊고 있던 소중 함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일상생활 속 익숙한 대상의 상실은 감당하기 힘든 상처로 돌아올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삶에서 간과하고 있거나 잊고 있던 가치를 되새겨보는 것도 필요하다. ‘키친’을 읽고 상실과 이별로 공허해진 마음을 치유하고 삶에 대한 전반적인 고민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정연아 기자 06znchung@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