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스러운 사실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냉혹하다. 모두가 남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끝없이 경쟁하며 발버둥 친 다. 이렇게 쉬어갈 틈이 없 는 시대에 여유는 사치다. 사람들은 사회의 부속품으로 똑바로 기능하기 위해 기계가 되기를 자처한다. 이 가운데 우리 마음속에서 인류애나 희망은 점차 사라져 간다.
작가 ‘쥘리앙 부이수 (Julien Bouissoux)(이하 부이수)’는 2003년 책‘ 펄프’를 통해 인 류애가 상실된 도시 파리를 살아가는 청년‘ 트리스탕 포끄’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부이수는 1975년 프랑스의 끌레르몽페랑 (Clermont-Ferrand)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파리와 런던 등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이후 △미국△캐나다△ 헝가리 등 다양한 지역에서 생활했다. 대학교에선 경제학을 전공 했으나 전공을 살리지 않고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현재는 영화감독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펄프엔 극적인 사건이 전개되지 않는다. 주인공이자 소설가인 트리스탕 포끄가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해 책을 출간하지 못하고 실업자가 된 뒤 여러 범죄를 일으키는 내용이 전부다. 그러나 소설 속에선 범죄의 심각성이 그리 진지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현관 매트 훔쳐 팔기△빈 아파트 무단 침입△지하철표 훔치기△성당 헌금함 훔치기 등의 범죄가 작가의 재치 있는 표현과 결합해 익살 스런 사건으로 변모한다. 이런 사건들 속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트 리스탕 포끄가 △범죄△윤리△타인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는 위에서 나열된 범죄를 일으키는 사이에 두 번의 연애와 이별을 겪고 공무원이 돼 노인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식사를 배급한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사건을 겪지만 누구와도 깊 은 인간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리고 작중에서 그가 겪는 △범죄△ 실업△연애 등 다양한 사건들을 마치 본인이 제삼자가 돼 관찰하 는 것처럼 여유롭고 냉소적인 태도로 대한다. 그러나 이런 표현 방식이 오히려 인류애가 사라진 파리의 냉혹함을 더욱 부각시킨다. 우리나라의‘ 버티고’ 출판사에서 수입·발간한 펄프 역본엔 역자 이선주가 부이수와 나눈 33가지 질문이 담긴 인터뷰가 실려 있다. 부이수는 질문에 짤막하게만 대답하거나 아예 답변을 회피하 며 인터뷰에 냉소적으로 응했는데 이 태도가 트리스탕 포끄의 행 동과 말투를 연상시켜 작품을 읽는 재미가 더해진다. 펄프를 읽으며 현대 사회의 냉혹함을 직시하는 동시에 그 안에서 살아가는 냉소적인 청년의 재치 있는 나날에 빠져보길 바란다.
장래산 기자 03raesan@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