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인디 록의 전설 델리스파이스의 윤준호 베이시스트를 만나다

등록일 2025년05월21일 23시25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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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인디 밴드(Indie Band)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이름이 있다. 아직도 대학 밴드부 공연에서 끊이지 않고 찾아볼 수 있는 ‘챠우챠우-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 보려 해도 너의 목소리가 들려’와 ‘고백’의 원곡자인 밴드 델리스파이스(Deli Spice)다. 윤준호(서양학이탈리아어는 1995년에 델리스파이스를 결성해 음악 활동을 이어오다 현재는 경인방송 라디오 ‘델리스파이스의 뮤직 시티 윤준호입니다’를 진행하며 서울디지털대학교 실용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우리나라 인디 록(Indie Rock)의 전설과 같은 밴드 델리스파이스의 윤준호 베이시스트(Bassist)를 만나보자. 

 

 

Q1. 우리학교 이탈리아어과에 진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이탈리아어를 조금 할 줄 알았어요. 우리학교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탈리아어 사전을 사서 혼자 공부해 봤고 이탈리아 음악에도 관심이 있었어요. 그게 진학으로 이어졌죠. 사실 그 시절엔 전공이 지금처럼 중요한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다들 전공과 관계없이 취업하고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였거든요.

 

Q2. 대학 시절의 경험이 삶의 방향에 있어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아웃사이더(Outsider)’란 교내 밴드 활동을 정말 열심히 했어요. 저는 밴드부에 들어가서 베이스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연습곡이 정해지면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연습하다 보니 1학년 땐 살이 10kg이나 빠졌었어요. 2학년 땐 말 그대로 ‘속이 썩는다’는 의미를 몸소 느낄 정도였어요. 그만큼 열심히 했단 뜻이겠죠. 무언가에 몰입해서 열심히 해본 경험은 그게 무엇이든 분명히 좋은 자산으로 남는다고 생각해요.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하고요. 동아리 활동이 제 인생을 결정지은 중요한 계기가 됐습니다. 

 

Q2-1. 음악을 할 때 비전공자로서의 장단점이 궁금합니다.

비전공자는 확실히 이론이 부족해서 다양한 시도를 하기가 어려운 면도 있고 연주력 측면에서도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어느 정도 나뉘어져 있어요. 그래서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음악에 한계가 있단 걸 느껴요. 그렇지만 실제로 오래 활동하며 잘된 인디 밴드 중엔 △노브레인(No Brain)△델리스파이스△자우림(紫雨林)△혁오처럼 비전공자들이 많아요. 오히려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더 자유롭게 저만의 색깔을 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론적으로 잘 모르니까 그냥 부딪혀보는 거죠.  

 

Q3. 음악인의 꿈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취미로 밴드 활동을 열심히 하다 보니 어느새 앨범까지 나오게 된 거예요. 그때도 “아, 나는 정말 운 좋은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지 음악으로 돈을 벌거나 직업으로 삼을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음악이란 건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만 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90년대에 너바나(Nirvana)가 등장했잖아요. 너바나는 아마추어리즘(Amateurism)의 정수를 보여준 팀 중 하나예요. 연주 실력이 뛰어나지 않아도 자기 색깔만 분명하다면 음악으로 승부를 볼 수 있단 걸 보여줬죠. 그 이후로 수많은 얼터너티브 록(Alternative Rock)* 밴드들이 등장해 지금의 인디 문화**로까지 이어졌고요. 그런 흐름이 있었기 때문에 저도 용기를 낼 수 있었어요.

 

Q4. 델리스파이스 결성 당시에도 취업 준비와 1집 작업을 병행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의 경험을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처음부터 전업 음악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었습니다. 밴드 결성 당시에 전 4학년이었지만 무역학과 복수 전공을 하고 있어서 1년이 더 남은 상태였죠. 일주일에 한 번만 등교할 정도로 시간 여유가 많았어요. 그래서 재미 삼아 만들어보자고 시작한 게 델리스파이스였어요. 요즘엔 밴드가 잘 되면 저작권료와 인세를 받고 무대에 서면서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 구조가 갖춰져 있는데 저희 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 자체가 없었어요. 기대치가 없으니까 무대에만 올라가도 앨범이 조금만 팔려도 감격스러웠죠. 하지만 당시엔 밴드로 생계를 이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저는 취직을 하려고 2집을 내고도 토익(TOEIC) 학원에 다녔었습니다.

 

Q4-1. 언제 밴드 활동에 전념해야겠다고 생각하셨나요?

사실 델리스파이스가 제 첫 직장은 아니에요. 제 첫 직업은 재학 중에 시작한 방송 작가예요. 당시엔 유선방송 음악 채널(Channel)이 활발하던 시절이라 장르별로 뮤직비디오를 소개하는 프로그램(Program)이 많았어요. 그런 데서 음악 대본을 쓰는 작가로 일했죠. 또 ‘TV 가이드(TV Guide)’라는 방송 잡지에 ‘윤준호의 팝 아이스(Pop Eyes)’라는 코너를 맡아서 ‘팝을 바라보는 시선’이란 주제로 매주 음악 칼럼을 기고했습니다. 그렇게 글 쓰는 일 덕분에 내한 오는 밴드들과 인터뷰도 많이 했어요. 블러(Blur) 같은 팀들과 단독 인터뷰한 기억도 있죠. 또한 외국 공연 취재를 위해 일본이나 동남아시아에 가서 직접 해외 공연을 보고 기사를 썼어요. 그러다 델리스파이스가 점점 잘되면서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음악 활동 중심으로 전환된 것 같아요.

  

Q5. 델리스파이스의 음악이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감회가 어떠신가요?

신기하죠. 사실 이제 델리스파이스의 음악은 옛날 음악이 됐잖아요. 그런데도 그렇게까지 오래된 음악으론 느껴지지 않는단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예를 들어 ‘고백’만 해도 2003년에 나온 곡인데 여전히 사랑받고 있단 게 정말 신기하고 감사하죠.

 

Q6. 영화 ‘시체가 돌아왔다’의 음악감독을 맡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음악 작업을 하신 경험이 있으신데 음악인으로서 추구하는 가치관이 궁금합니다.

저는 거창한 가치관을 가지고 음악을 해온 건 아니지만 나중에 돌이켜봤을 때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매 순간을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긴 계획을 세우고 살아간다기보다 그냥 주어진 일을 후회 없이 재미있게 잘 해보잔 마음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영화 ‘시체가 돌아왔다’는 제가 처음으로 음악감독을 맡은 상업영화였어요. 감독님이 이후에도 시나리오를 5편 넘게 보내주셨는데 안타깝게도 전부 제작이 무산됐어요.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그때 정말 혼신을 다해 작업하길 잘했단 생각이 들어요. 혹시라도 ‘다음 기회에 더 잘하지 뭐’하면서 힘을 아꼈다면 다음 기회 자체가 안 왔을 수도 있잖아요.

 

Q7. 현재 경인방송 라디오 ‘델리스파이스의 뮤직 시티 윤준호입니다’를 진행 중이신데 라디오 진행 경험에 대해서 말해주세요.

제가 처음으로 라디오 진행을 맡은 건 1999년이었습니다. 전에 이소라 씨 프로그램에서 코너를 맡긴 했었지만 정식으로 진행해 본 건 그게 처음이었어요. ‘델리스파이스의 우리들’이란 프로그램이었는데 그게 저한테는 시작이었죠. 지금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한 달만 대타를 해달라는 요청으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7년째 진행하고 있네요. 라디오는 제게 직업이라기보다 생활에 가까워요. 마치 친구 만나듯 자연스럽게 스며든 일상 같아요. 친구 만나러 갈 때 무슨 이야기를 할지 미리 준비하지 않듯 라디오 역시 특별한 내용 없이도 청취자들과 그 시간을 함께 보내는 느낌이 좋습니다.

 

Q7-1. 라디오 진행을 하시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경험이 있으신가요? 

제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1인 제작 프로그램입니다. △작가△진행△콘솔(Console)△피디까지 전부 제가 하는데 저는 이 구조가 오히려 잘 맞더라고요. 혼자서 하다 보니 생방송 중에 코너를 만든 적도 있어요. 한 청취자분이 올린 공연 후기가 여러 개 있었는데 그걸 보고 ‘나의 공연 관람기’란 코너로 4주 동안 소개했어요. 작가나 피디가 있었으면 즉석에서 그렇게 진행하긴 어려웠을 거예요.

 

Q8. 실용음악과에서 강의하고 계신데 교수님의 위치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제가 맡은 수업은 온라인으로 진행되다 보니 많은 학생들이 수강합니다. ‘한국 대중음악사’의 경우에는 800명이 넘게 수강하고 있어요. 녹음실에서 카메라를 보며 강의해야 하기 때문에 제가 강의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마음가짐’이에요. 또한 재밌는 강의를 만드는 게 제 목표입니다. 저는 항상 ‘지금 이 앞에 학생이 있다’고 생각하고 화면 너머 학생들이 웃고 반응하는 걸 상상하면서 질문을 던지고 농담도 해요. 감사하게도 제 강의를 기다려주는 학생들이 많아요. ‘교수님 강의는 치유받는 시간이었다’ 같은 강의평을 받으면 정말 기쁘죠. 

 

Q9. 앞으로의 인생에서 개인적인 목표를 여쭤보고 싶습니다.

예전엔 무대에서 혹은 앨범을 통해 제 음악을 들려줬다면 지금은 말이나 글로 음악을 전하고 있어요. 돌이켜보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음악을 전하는 사람’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은 같더라고요. 강의도 마찬가지로 한 학기 수업을 들은 학생이 ‘교수님 덕분에 제 재생목록이 완전히 바뀌었어요’라고 말해주면 정말 뿌듯하죠. 사람들 앞에서 강의하거나 특강을 다니면서 준비한 내용을 전하고 듣는 분들이 재밌어하는 걸 보면 ‘내가 이 일을 좋아하는구나’ 싶어요. 제 일을 열심히 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게 제 바람입니다.

 

Q10. 마지막으로 현재 음악인의 꿈을 키워나가고 있는 재학생들에게 조언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저는 스스로를 치밀하게 분석했으면 음악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밴드로 생계를 이어간다는 건 상상도 못 하던 일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진심으로 원하는 게 있다면 때론 앞이 보이지 않아도 그냥 한 걸음 내딛는 무모함이 필요합니다. 잘 닦아놓은 고속도로 대신 직접 나무를 자르고 자갈을 깔아 만든 숲길을 걸어가는 사람도 있어야 하잖아요. 그렇게 닦아놓은 길을 나중엔 누군가가 따라 걸어올 수도 있고요. 힘들었지만 결국엔 가치 있는 길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이 참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얼터너티브 록(Alternative Rock): 1990년대 초에 기존 록 음악의 구성 방식에서 벗어난 록 밴드들이 등장하면서 인기를 끌게 된 록의 한 장르

**인디 문화: 상업적인 거대 자본이나 주류 문화 흐름에서 벗어나 창작자가 독립적으로 제작 및 유통하는 문화

 

 

윤고은 기자 10goeun@huf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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