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 히말라야 16좌 완등의 신화 엄홍길 대장을 만나다

등록일 2020년12월04일 11시48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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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원동산’을 벗삼아 지낸 엄홍길(동양학·중어 02) 대장(이하 엄 대장)은 우리나 라의 대표 산악인이다. 1988년 에베레스트를 시작으로 △초오유 시샤팡마△안나푸르나 낭 가파르밧△칸첸중가 K2봉 등을 완등하며 세계 최초 히말라야 16좌를 완등했다. 이젠 봉사 라는 새로운 17좌 목표를 위해 노력 중인 엄 대장을 만나보자.
Q1. 1988년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작으로 전문 산악인이 됐는데, 이 길을 걷게 된 배 경은 무엇인가요?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세 살 때부터 부모님이 원동산에 거주하며 장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산 자체가 삶의 터전이자 놀이터가 됐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산의 재미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집 근처 암벽지대에 호기심이 생겨 암벽 등반을 시도하기도 했 어요. 이런 경험은 훗날 산악인이 되는데 도움이 됐습 니다. 자연스럽게 산악인으로서 유리한 조건의 상·하 체가 발달하게 됐죠.
Q2. 산악인으로 활동하는 도중 우리학교 중 어중문학과에 진학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언어 장벽을 느껴 우리학교 중어중문학과에 진학했습 니다. 주로 가던 △네팔△티베트△파키스탄에선 언어 를 잘 몰랐어도 소통이 원활했어요. 그러나 중국에선 언어 장벽에 많이 부딪혔습니다. 매번 통역가를 동행해 활동하니 불편했죠. 그래서 중국어 학습의 필요성을 느 꼈어요. 그래서 이후 어느 정도 생활에 여유가 생긴 뒤 우리학교 중어중문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중국어에 귀 가 조금씩 트며 중국인과 기본적인 대화도 할 수 있었 죠.
Q3. 우리학교 재학 시절 기억에 남는 활동 이 있나요?
2004년에 우리학교 개교 50주년을 맞이해 산악부 △ 동기△선배△후배와 히말라야의 얄룽캉을 등산하기 로 했어요. 15좌 완등을 우리학교 산악부원과 함께했 습니다. 등반과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 완등 에 성공해 정상에서 당시 안병만 우리학교 총장과 영상 통화도 했어요.
Q4.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6좌를 완등했습 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매 순간이 기억에 남아요. △성공한 순간△실패한 순간 △사고로 동료를 잃은 순간 모두 생생히 뇌리에 각인됐 죠. 히말라야 16좌 완등까지 22년이 걸렸어요. 그 과정 에서 10명의 동료를 떠나보냈습니다. 그 순간이 특히 잊히지 않네요.
Q5. 등산하며 겪은 위기 상황을 어떻게 극 복했나요?
정말 많은 위기를 겪었고 그럴 때마다‘ 이 순간도 지나 가리라’고 생각해요. 위기는 결코 오래가지 않거든요. 위기가 두려워 포기하면 절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요. 신의 영역인 해발 8,000 미터 등산엔 헤아릴 수 없 는 상황이 동반됩니다. 그럴 때마다 이 순간을 극복해 야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스스로 다짐하죠. 위기의 순간에 낙담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며 극복했어요. 누구 든 자신의 길을 걷다보면 위기가 오기 마련입니다. 얼 마만큼 빨리 벗어나느냐가 관건이에요. 그 위기를 벗어 나지 못하면 영원한 낙오자가 되죠.
Q6. 긴 시간 함께 하는 산악 원정대는 서로 간 협력이 중요합니다. 대원과 협력할 때 무 엇을 중요하게 여기나요? 또 대원들 사이 갈 등이 발생했을 때 대장으로서 어떻게 대처했 나요?
협력에서 가장 중요한 건 본인을 희생할 줄 아는 겁니 다. ‘나와 동료는 하나다’고 생각하는 거죠. 대원과 함 께 하나의 목표를 위해 달려가야 한다 생각해요. 왜냐 면 원정대는 개인이 아닌 우리기 때문이죠.
갈등이 생겼을 땐 대원 개개인의 생각을 파악하려 합 니다. 대원과 면담을 통해 그들의 고충을 듣고 같이 해 결하려 해요. 등반할 땐 개인 능력뿐만 아니라 올바른 정신·심리 상태를 갖는 것도 중요하죠. 대장으로서 항상 대원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만큼 대원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져야 해요.
Q7. 히말라야 16좌 완등 후 소감이 궁금합 니다.
‘감사합니다’와‘ 고맙습니다’ 이 두 문장이 생각났어 요. 성공엔 제 능력과 의지도 중요했지만 동료가 있었 기에 가능했어요. 그래서 무엇보다 함께한 동료에게 너 무 고마웠습니다. 무사히 완등할 수 있게 허락해준 히 말라야 산도 정말 감사했죠. 해발 8,000 미터의 히말라 야 산은 신과 죽음의 영역이라 불릴 만큼 온전히 인간 힘으로 극복하지 못하는 부분도 존재해요. 결국 신과 산이 절 받아줬기에 16좌 완등이 가능했습니다.
Q8. 2015년 5월 25일에 발생한 네팔 대지 진 당시 네팔에서 구호 활동 및 학교 설립을 했습니다. 구호 활동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2008년 5월부터‘ 엄홍길휴먼재단’을 설립해 네팔 산 지에 학교를 세우는 사업을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이후 2015년 당시 네팔 대지진 소식을 접하자마자 구 호활동을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홍보대사로 활동한 대한적십자와 함께 5월 28일 네팔로 가 구호 활 동을 했죠.
Q9. 인생 17좌 목표가 봉사입니다. 이 목표 를 세운 이유가 궁금합니다.
히말라야 16좌 완등 과정을 돌이켜 보면 제 노력과 의 지 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기에 성 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이에 완등을 성공하면 받 은 은혜를 베풀며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는 삶을 살 것 을 히말라야와 약속했습니다.
Q9-1. 현재 17좌 목표에 어느 정도 도달했 나요?
17좌의 초기 목표는 전부 도달했고 새로운 목표를 위해 노력 중입니다. 초기 17좌 목표는 네팔에 학교 16개를 설립하는 것이었습니다. 네팔 아이들을 만나며 교육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에요. 2009년 10월부터 이번 해 1월까지 16곳에 학교를 세웠어요. 12년이란 짧은 기 간 안에 17좌 목표를 달성했죠. 그 과정에서 네팔의 교 육 현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학교 설립 외에도 부족한 부분이 눈에 보였어요. 그래서 교육 마을 건립이 새로 운 18좌 목표가 됐고 이를 위해 열심히 노력중입니다.
Q10. 마지막으로 우리학교 학생에게 한 마 디 부탁드립니다.
‘외대를 만나면 세계가 보인다’란 말처럼 우리학교 후 배가 넓은 세계를 봤으면 해요. 우물 안에 있으면 본인 이 대단해 보일 수 있죠. 그래서 그 우물 밖으로 나왔으 면 해요. 한계를 뛰어넘고 새롭게 도전했으면 좋겠습니 다. 저도 히말라야 등반 전엔 기고만장했어요. 그러나 히말라야 등반에서 실패를 맛보며 제 자신이 얼마나 작 은지 실감했죠. 후배들이 꿈을 갖고 더 큰 세상을 위해 도전했으면 좋겠습니다.


김연수 기자 100yeonsue@huf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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