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태교(胎敎)를 쓰다 - 이사주당 묘

등록일 2020년11월10일 13시00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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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캠퍼스(이하 글캠) 정문을 기준으로 마지막 종착지인 인문경상관을 지나 올레길에 들어서 조금 더 발길을 위로 하다보면 용인시의 향토 문화재 제67호로 지정된 이사주당과 유한규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이사주당은 세계 최초의 태교 관련 저술이라 할 수 있는 ‘태교신기(胎敎新記)’를 남긴 조선 시대 여성학자다. 남자만이 유교적 도덕을 갖춘 군자의 삶을 살 수 있단 이른바 유교적 남녀관이 팽배했던 조선 시대에 당당히 여성으로서 군자의 삶을 살았다. 또한 여성들이 학문적으로 주체적인 삶을 살기 어려웠던 시기에 여성 지식인으로서 고군분투했다.
조선 태종의 서자인 경녕군의 11대손인 이사주당은 충청남도 목천면 일대의 옛 행정 구역인 ‘목천현’의 현감인 유한규와 혼인 이후에 용인에서 살았다. 아들 유희는 ‘언문지’ 등 100여 권의 저서를 남긴 실학자이자 언어학자였다. 어린 시절부터 사서삼경을 공부하며 유교적 교양과 사유 방식을 습득한 사주당은 실제 생활에서도 학문에서 제시하는 △도덕△예절△윤리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모습에 감동한 남편 유한규는 부인을 공경했으며 둘 사이는 단순 부부 사이를 넘어 학문적 동반자로서 평생지기의 모습을 보였다.
‘태교신기’는 사주당이 1800년에 한문으로 지은 태교 교육지침서다. 이 책을 쓸 무렵 사주당의 나이는 환갑을 넘긴 62세였다. 사주당은 책을 지은 지 20여 년이 지난 시점에 막내딸이 갖고 있던 상자 속에서 다시 발견했다. 책을 그냥 없앨 수 없어 자기 생각을 덧붙여 완성된 책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이것이 독자들을 위해 다시 재편집된 것은 1801년 유희에 의해서였으며 어머니인 사주당의 글을 10편으로 나누어 주를 달고 우리말로 해석했다.
사주당은 “뱃 속 10달이 출생 후 10년의 가르침보다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는데 태교를 이론으로만 다루지 않고 4명의 아이를 직접 낳아 기른 경험과 지혜를 담아냈다. 이런 실천을 통해 태교가 주는 이로움을 의심 없이 믿을 수 있었다. 근대 역사학자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는 유전자를 온전케 보존하기 위해선 약물치료나 식이요법보다 태교가 훨씬 나은 것이라며 태교신기를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이사주당과 태교신기는 20세기 초에 많이 알려지게 됐으며 최근 용인시의 ‘태교 도시’ 조성 정책으로 관련 연구와 활동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런 관심은 1980년에 만들어진 우리학교의 ‘용인캠퍼스 마스터 플랜’에도 나타나 있다. 이는 이사주당의 묘소가 당시 글캠 설립 예정지의 뒷산에 있었기 때문이다. 마스터 플랜 속 도면엔 △교육△도리△인성△지혜 등의 의미를 담아 이사주당을 캠퍼스의 상징물 중 하나로 삼을 계획도 있었다.


*외대 역사관에서는 그 시절 추억이 담긴 서울캠퍼스와 미네르바 동산 관련 사진 기록물을 수집합니다. 동문 구성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기증 문의– 외대 역사관 : 02-2173-3981)
-기록 및 사진 제공 : 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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