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교실이 참 답답했다. 선생님의 지루한 음성을 들으며 옆자리 친구가 뿜어낸 이산화탄소에 취해 몽롱한 정신으로 수업을 듣곤 했다. 10분의 쉬는 시간이 찾아오면 물을 마시거나 화장실이 가고 싶지 않아도 꼭 교실 밖으로 나갔다. 학교 산책로를 거닐거나 친구들과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으면 10분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어김없이 수업 시간은 다시 찾아왔다.
마지못해 자리에 앉은 난 이내 상념에 잠기곤 했다. 한 반에 갇혀 같은 목표를 향해 욕구를 억누르며 노력하는 친구들. 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잘하면 좋은 학생으로 분류되고 그렇지 못하면 소외되는 우리. 이를 부추기는 선생님과 공교육 시스템. 그리고 누군가 옳다고 정한 획일화된 가치.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떠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불만이 있었던 것 같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인가. 우린 왜 누군가가 정한 가치를 따라가야 하나.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 어느새 수업이 시작돼 있었다. 놓친 부분의 필기를 친구에게 빌려 채워 넣을 생각을 하며 수업에 집중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사회적 시스템에 반항할 용기는 없었고 나 역시 좋은 대학을 가고 싶었다. 이런 내 욕망이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정해준 가치를 그대로 따르고 싶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학만 가면 모든 게 해결될 거란 식으로 말하던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의 말은 틀린 것 같다. 고등학교 친구 A는 누구나 꿈꾸는 대기업 입사를 위해 오늘도 여러 스터디를 병행한다. 전문직의 꿈을 가진 친구 B는 고등학교 때처럼 아침 7시부터 밤 12시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한다. 이들보다 한 걸음 늦게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는 난 가끔 고등학교 시절 교실에서 겪었던 답답함이 느껴진다. 어쩌면 이 답답함은 생을 살아가며 떼어낼 수 없는 종류의 느낌이라 생각한다. 답답함을 견딜 수 없을 땐 언제나 책을 폈다.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란 개념은 내가 느끼는 답답함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해줬다. 인간은 삶 속에서 의의를 찾으려 한다. 하지만 인간을 둘러싼 세계는 너무나 거대하고 부조리해 인간이 쫓으려는 의의와 언제나 충돌한다. 세계는 부조리란 구조로서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유한하고 미약한 인간은 언제나 반복적으로 패배한다. 책 ‘시지프 신화’ 속 담긴 이런 내용은 암울했지만 내가 어렴풋이 느꼈던 생각이나 감정을 누군가가 이미 언어로 정리해 놨다는 사실이 날 묘하게 위로했다.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구조 속에서 반복적으로 피해를 입고 목숨을 빼앗기는 자의 소식을 접할 때면 마음에서 울컥 올라오는 게 있었다. 평택항에서 컨테이너 날개에 깔린 젊은 노동자와 군 내 성추행으로 자살한 군인의 뉴스를 접할 때가 그렇다. 사회와 집단 내 부조리가 구조로 자리잡게 되면 개인은 이에 대항하기 힘들어지고 비슷한 피해자가 반복적으로 발생한다. 난 이 부조리가 싫어 기자란 꿈을 꾼다. 내가 사회의 구조를 바꿀 수 있단 허황된 꿈은 꾸지 않는다. 시지프 신화 속 시지프가 언덕 위로 돌을 굴리고 정상에 다다르면 다시 처음부터 돌을 굴리는 벌을 받는 것처럼 기자로서 사회를 바꾸겠단 시도는 대부분 실패할 것이다. 다만 시지프가 자신에게 주어진 벌을 묵묵히 이행하는 것처럼 나도 기자로서 사회 속 존재하는 부조리를 세상에 알리고 싶다. 그렇게 맡은 바를 수행하다 보면 세상이 바뀌진 않아도 조금은 나아지진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