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세계적으로 고물가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촉발된 지정학적 긴장관계는 ‘오일 쇼크’에 버금가는 유가상승을 불러일으켰다. 지난해 초 배럴당 47달러였던 유가는 현재 118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단기간에 내려갈 가능성은 낮기 때문에 향후 1~2년간은 고물가의 시기를 보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식량가격도 폭등하고 있다. 이미 지난해부터 곡물가격은 불안했다. 팬데믹의 여파로 일부 해운 물류가 마비되고, 주요 생산 지역의 △가뭄△산불△홍수 등이 잦았기 때문이다. 올해 2월에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곡물가격의 급등을 불러일으켰다. 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밀 수출국이며,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빵 바구 니’로 불리는 곡창지대이다. 양국이 전 세계 곡물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밀 27% △보리 23%△해바라기유 53%이다. 전쟁 직후 한 달 동안 밀 가격은 21%, 보리 가격 은 33% 상승했다. 곡물 생산에 필요한 비료 가격도 급등했다. 경제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비료 원료의 주요 수출국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현재의 식량 가격 폭등 현상이 단시일 내에 진정되기 어려울 것으로 본다. 파종 및 생산시기를 놓쳤고, 저장 및 운송 등 물류시설이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또한 에너지 가격과 연동되어 있어 고유가가 지속되는 한 식량가격이 하락하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식량위기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식량위기는 주로 △서남아시아△아프리카△중동 등에서 주기적으로 도래했다. 사실 전 세계의 식량생산 능력은 세계인의 수요를 충족시키고도 남는다. 균일하게 잘 배분된다는 전제에서 그렇다. 반면에 식량위기가 반복되는 이유는 △국가 간 정책갈등△급격한 경기변동△자연재해 등으로 물류 교란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전쟁이라는 지정학적 갈등이 추가적으로 작용했다. 주요 수출국들이 식량안보를 목적으로 수출을 통제한 점도 가격상승을 부추겼다.
식량위기는 주로 소득수준이 낮고, 식량자급률이 낮은 국가에서 발생한다. 현재로선 러시아산 곡물 수입이 많은 북아프리카와 중동 국가들이 취약하다. 가령 이집트와 터키는 러시아산 밀의 최대 수입국이며 △방글라데시△아제르바이잔△이란도 주요 수입국이다. 우크라이나는 농산품 생산의 약 75%를 수출한다. 곡물시장은 특성상 세계적으로 수요와 공급이 통합되어 있다. 특정 지역의 곡물가격의 변동은 전 세계 곡물가격에 즉각적으로 반영된다. 선진국의 경우 높은 곡물가격을 감당할 수 있는 여력이 있지만, 개발도상국은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북아프리카△서남아시아△중동 국가들은 식량자급률이 낮다. 소득불평등도 심 해서 식량가격이 상승할 경우 많은 서민층이 어려움을 겪는다. 러시아산 밀의 주요 수입국인 튀니지와 이집트를 비롯해 터키, 파키스탄 등에서는 경제난이 고조되면서 시민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문제는 식량위기가 정치위기로 변화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가령 2007~2008년의 기간 중 식량가격과 유가가 급등하면서 아프리카와 중동지역 국가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2010년 말 촉발된 ‘아랍의 봄’ 사태는 식량위기의 연장선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 결과 △이집트△예멘△튀니지 등에서는 정권이 교체된 바 있다. 2019년에는 유사한 사태가 수단 등 아프리카 지역에서 재현되었다.
결국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파고는 유럽을 넘어 전 세계의 빈곤지역에 큰 문 제를 일으키고 있다. 서로가 경제안보에 민감해진 상황에서 각자도생은 큰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 갈등의 원인을 따지는 것과는 별개로 △보건△식량△에너지△환경 관 련 의제에 있어 강력한 다자간 협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분야별 협력 의제에 있어서는 우리나라와 같은 중견국은 ‘의제별 리더십(issue-based leadership)’을 보일 필요가 있다. 우선 식량 부족 문제를 겪는 아프리카 및 중동 국가에 대해 식량지원이 확대되 어야 한다. 북한도 유사한 문제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대북관계에 있어서도 잠시나마 열릴 수 있는 협력의 기회를 활용할 필요도 있다. 장기적으로는 식량문제에 대처할 수 있도록 농자재 지원이나 생산기반 구축을 위한 지원도 병행할 수 있다.
·강유덕(LT학부 교수, 외대학보 편집인 겸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