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9 참사와 애도의 방식

등록일 2022년11월09일 18시35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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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건이나 재난은 그 사회가 처한 현실을 정확하고 서늘하게 자각하게 한다. 그 리고 그 사건을 규정짓는 방식은 향후 그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가늠하게 한다. 그렇기에 벌어진 일에 대해 정확히 규정하고 진단하는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10월 29일 저녁, 핼러윈을 즐기러 나간 이태원 거리에서 156명(대부분이 젊은이들이다)이 압사당해 죽었다. 우리는 이에 대해 1주일의 국가애도기간을 정하여 그 애통한 죽음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156명의 죽음을 두고 ‘참사’가 아니라 ‘사고’라고 하고 ‘희생자’가 아니라 ‘사망자’라고 굳이 선을 긋는 것은 왜일까? 국가 애도기간까지 정해 놓고 말이다. 더구나 그 애도기간에 시민사회단체들을 사찰하고 감시하라고 명하는 행정부는 국민의 안전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국민을 잠 재적인 범죄대상자로 보며 감시하는 것이 목적인가. 

10월 29일 이태원에서 발생한 일은 단순한 ‘사고’나 ‘사건’이 아니다. ‘사고’는 뜻밖 에 일어난 불행한 일,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나쁜 일을 뜻하고 ‘사건’은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주목 받을 만한 뜻밖의 일, 수사 기소, 재판 등 사법 작용의 대상 이 되는 일을 뜻한다. ‘사고’이나 ‘사건’이 개별성을 띤다면, ‘참사’는 비참하고 끔찍한 일을 두루 일컫는 말이다. 그 점에서 이번에 이태원에서 발생한 그 기막힌 죽음 은 사고이자 사건이면서 명백히 비극적인 참사다. 

그 가엾은 죽음을 두고 ‘희생자’라는 말을 굳이 피할 이유가 없다. 평소처럼, 예년처럼, 적절한 행정력이 동원되어 거리에서 시민들의 걸음을 조절했더라면 막을 수 있었을 죽음이다. 그날 저녁 6시 37분부터 수십 번 있었던 신고들, “압사당할 것 같아요”라는 신호에 기민하고 책임감 있게 대응했더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죽음이다. 우리나라는 시민의식이 매우 높은 편에 속한다. 수십만 혹은 수백만 인파가 모여도 평화롭게 다치는 사람 없이 행사가 진행된 과거의 수많은 사례들은 우리 국민의 선진적인 시민의식을 잘 보여준다. 핼러윈을 즐기는 젊은이들이 이태원이라는 공간, 다국적 문화가 별 이질성 없이 섞이는 그 골목에 모이는 것도 처음이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는 젊은이들이 자연스럽게 늙어가기 힘든 나라가 되었다. 젊 은이들이 일하다가 끼여 죽고, 떨어져 죽고, 과로로 죽고, 희망이 없어 죽는다. 한 해 828명, 882명의 산재 사망자가 발생하는 나라. 그런데 이제는 젊은이들이 거리에서 걷다가 무더기로 죽은 기이한 나라가 되었다. 행사 주체가 없기 때문에 책임 주체가 없다는 말은 국가와 공권력, 행정력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인하는 말이다. 축제를 즐기기 위해 자연스럽게 거리에 나간 사람들이었기에 더욱 국가의 행정과 안전장 치가 작동했어야 한다. 우리가 세금을 내는 이유다. 156명의 죽음은 일선 경찰에 책 임을 지울 일이 아니라 경찰조직을 움직이는 행정수반에 책임이 있는 막중하고 비극적인 참사다. 

이 참혹한 죽음 앞에서 국가는 공적인 애도기간을 두었다. 국가가 정한 애도기간 에 우리는 이름도 사진도 위패도 없는 분향소에서 절을 했다. 이 죽음이 어떤 방식 으로 거두어질지 아직 가늠하기 힘들지만, 기자회견장에서 농담을 하는 총리나 책 임보다는 회피로 일관하는 행정부 수반의 행위와 말을 보면 죽음을 서둘러 봉하려는 것은 아닌지, 이번 공적 애도기간도 그를 위한 장치는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이름을 가린 애도가 희생자들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측면도 있겠으나 그 또한 세월호 이후 희생자들에게 과격하게 가해진 조롱과 혐오가 더 큰 문제지 희생자들을 지울 이유는 없다. 이름도 위패도 없이 A씨, B씨, C씨, D씨 등 기호로 젊은이들을 떠나보 내며 애도의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애도는 죽은 이들이 살았던 흔적을 지우는 일이 아니다. 그들의 삶을 경건하게 기리는 일이다. 한 사람은 하나의 우주다. 한 생명이 이 땅에 깃들어 사람으로 자란 과정, 그 꿈과 희망과 정성, 가능성을 생각해보라. 한 목숨, 하나의 우주가 꺼지면 그와 연결된 수십 개의 우주도 함께 꺼진다. 이 죽음은 안전을 중시하지 않고 효율만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무서운 전조처럼 느껴진다. 기후위기가 몰고 올 재난이나 전쟁 가능성도 한층 높아진 지금, 안전보다는 효율을 내세우는 정책은 매우 위험하다. 우리는 일터에서, 거리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참사 이후, 회피가 아닌 책임 있는 진단과 조사가 시작될 때, 그때 우리의 애도도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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