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보도의 중요한 사명 중 하나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어 사람들에게 어떤 사건의 실체와 진실을 알리는 것이다. 그렇게 알림으로써 지금 현실의 문제를 개선 하여 세계를 더 낫게 만들려는 지향이 언론의 영역에 있는 카메라와 기자가 하는 일이다. 사람들이 모든 사건의 현장을 다 알지 못하니까 말이다.
이 세계의 비참과 가난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가난한 이들을 돕게끔 하는 것도 보도의 중요한 목적이다. 그런데 비교적 정직한 재현 방식으로 알려진 사진의 경우 어떤 이미지는 인종적 편견을 부추기고 동정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존엄을 침해하기도 한다. 굶주린 아이의 앙상한 팔다리, 아픈 아이의 늘어진 몸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과장된 연출이 동원되기도 한다. 카메라가 응시하는 대상에 대한 연민을 필요 이상으로 자극할 때 우리는 이를 ‘빈곤 포르노’(poverty porno) 라 부른다.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부적절하게 타인의 비참을 재현하는 것으로 ‘빈곤 포르노’는 사회적, 미학적, 학문적으로 정착된 개념으로 어떤 주제에 대해 관음증적 관심을 드러내는 출판물이나 방송을 일컬어 비판적으로 쓰인다.
최근 대통령의 동남아시아 해외순방에서 김건희 여사의 캄보디아 봉사활동을 촬영한 사진을 두고 ‘빈곤 포르노’라는 비판이 나왔다. 심장병에 걸린 아이의 가련함을 부각한 사진은 특정 방송사의 카메라가 촬영한 것이 아니라 대통령실에서 나온 것 이기에 사실을 정확히 알리는 보도 자체의 목적보다는 빈곤과 의료문제에 관심을 둔 여사의 활동을 알리는 이미지 정치의 일환이었다. 아이를 돕고 싶다는 뜻은 분명 했으리라. 다만 그 사진을 두고 ‘빈곤 포르노’라고 할 때, ‘포르노’라는 단어가 들어갔다 하여 여성혐오니 반여성적인 발언이니 하는 것은 단어가 개념화되는 과정에 대한 상식이 부족함을 보여준다. 한 여당 의원은 그 말이 여사를 부정하다고 낙인찍는 인격 모독이라 주장하기도 하는데, 공부를 하지 않는 정치가 얼마나 소모적인 논쟁을 야기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포르노의 탄생에는 분명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반여성적인 역사가 자리한다. 하지만 ‘빈곤 포르노’라는 말은 여성혐오가 아니다.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포르노그래피는 매우 문제적인 개념인데, 현대에는 즉각적인 만족을 만들기 위해 선전하는 경향으로 다른 단어와 결합하여 폭넓게 쓰인다. 이 세계의 폭력과 가난을 극적으로 노출하여 반복적인 관음증을 낳는 소비 방식을 지칭하는 것으로 학술적으로 정착된 ‘빈곤 포르노’는 타인의 내밀한 부분을 허락도 없이 파고 들어가는 시선이 갖는 폭력성과 외설성을 비판하고 시선의 대상이 되는 존재의 윤리적인 권리를 확보해주 자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말이다.
애도와 연민, 분노를 감정적으로 휘발하려는 시도는 손쉽게 관음증적 시선으로 바뀐다. 이번에 논란이 된 사진의 경우 도움 받는 대상의 현실의 비참을 가련하게 비추고 도움 주는 자를 박애주의자로 연출한 의도가 보인다. 자기 이미지를 돋보이게 하면서 아이를 수동적인 시혜 대상으로 재현하여 편견을 확산시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착취다. 비참과 연민의 대상을 불필요하게 노출시키고 무분별하게 소비되 게끔 하는 것은 그 대상을 폭력적으로 전유하는 일이기에 인권 감수성에도 맞지 않다. 2020년 기준, OECD 개발원조위원회에서 우리나라가 가난한 나라에 보내는 의 료지원은 현저히 낮은 축에 속한다. 과도한 이미지 정치 말고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의료지원을 할 일이다. 무지한 정치가 불필요한 논쟁을 낳고 결과적으로는 처음에 뜻한 문제의식까지 희석시키는 현장이 안타깝다.
이태원 참사 사건에서부터 대통령의 해외 순방을 둘러싼 여러 사건들에 이르기까지, 최근의 정치 현장은 말의 혼란과 무의미한 논쟁 속에서 정작 중요한 쟁점들이 사라진, 그야말로 정치가 실종된 파국의 현장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나라는 기후 위 기, 교육 현장의 위기, 노동의 위기, 안보 위기, 경제 위기 등 모든 국면에서 위기를 맞고 있다. 입법과 예산을 둘러싼 문제가 산적해 있는데 정치는 그런 현실에 대한 건강한 대안을 말하지 못하고 여야 할 것 없이 말의 혼란 속에서 방향을 잃고 자극적인 논쟁만 벌인다. 언론의 자유가 시험대에 오르고, 국민들은 인간의 가치가 지워 지는 사회적 참사와 책임 없는 정치 속에서 분노하고 지쳐간다. 권력이 자기가 져야 할 책임을 지고 정당한 방식으로 일을 하려면 정명, 즉 이름을 바로잡아야 한다. 정 명의 길은 모든 정치의 기본이다. 자신이 한 말과 행동, 자신의 자리에 적합한 책임을 지는 정명의 정치를 보고 싶다.
·정은귀(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외대학보 편집인 겸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