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등록일 2022년12월07일 12시00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기사글축소 기사글확대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한국계 미국인 작가 민진 리(Min Jin Lee)의 영어 소설『 파친코』 첫 문장이다. 일본 으로 건너간 한인 이민자 가족의 3대에 걸친 서사를 그린 이 소설은 애플에서 드라 마로 만들어 미국의 독립영화 시상식인 고담 어워즈에서 작품상을 받은 바 있다. 미 국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극찬했고, 최근에는 부천 디아스포라 문학상을 수상 하여 작가가 한국에 다녀가기도 했다. 2009년에 국제학술대회를 조직하면서 민진 리를 초대했는데 섭외 차 연락을 주고받을 때 작가가 하던 말이 생각난다. 일본에서 일제 강점기를 다룬 소설을 쓰고 있는데, 독자들이 큰 주목을 하지 않는 일본과 한 국의 역사를 쓰는 일이 무척 고독하고 힘들다고. 

그 소설이 2017년 출간되어 뉴욕 타임즈, USA 투데이, 영국 BBC에서 올해의 책으 로 선정되었고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2018년에 연구차 미국 보스턴에 갔을 때, 바닷가의 한 마을에서 우연히 만난 어느 평범한 시민이 이 소설을 반겨 이 야기하며 한국 근대사의 아픈 역사에 대해 꼬치꼬치 묻던 기억이 난다. 그때 이 소 설이 미국사회에서 그간 주목하지 않았던 한국의 근현대사, 특히 디아스포라의 삶 을 새롭게 비춤으로써 한국에 큰 관심이 없던 보통 사람들의 마음까지 움직이는 힘 을 실감했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첫 문장의 의 미를 생각해본다. 역사 안에서 개인은 패배할 수 있다. 역사 안에서 개인은 망가질 수 있다. 평범한 삶을 살던 한 개인이 국가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누명을 쓰기도 하 고, 사회에서 여러 가지 부조리와 피해를 경험하기도 한다. 우리는, 매일, 다치고, 상 처를 입고, 패배하고, 좌절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러한 과정에서 역사가 개인에게 작 동하는 잔혹극 자체보다는, 역사라는 거대한 개념조차 한 개인이 삶에 맞서는 불굴 의 의지와 투지를 완전히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작가가 여러 강연에서, 나라 잃은 설움 많은 시절을 살아왔지만 당당히 이 세계의 한 부분을 차 지하며 살아가는 한국인의 자긍심을 되풀이 강조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국가와 개인, 역사와 개인의 관계는 이처럼 늘 다소 착잡한 긴장 관계 안에서 사 유된다. 열심히 일하고 공부해도 청년들에게 안정적인 생활의 꿈을 키우지 못하는 나라를 ‘헬(hell) 조선’이라고 하는 것도 그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최근 우리 국민을 잠 못 들게 하는 월드컵에서 인상적이었던 한 장면이, 다친 몸으로 최선을 다해 그 라운드를 누비던 선수가 경기 후 인터뷰를 하면서 “이토록 멋진 나라”(this amazing country)를 대표하여 뛸 수 있다는 것이 영광이라 말하는 것을 들었다. 

갈수록 살기 어려워지는 이 땅에서 다들 한숨을 내쉰다. 청년 세대에 합당한 미래 의 꿈을 설계하지 못하고 약자를 품고 위하는 정책 대신 권력과 돈의 질서 안에서 많은 것이 결정되는 이 나라에서, 또 서로 다른 가치를 지닌 이들을 향해 너무나 쉽 게 혐오의 말들을 쏟아내는 이 거친 땅은 살기 쉬운 곳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나라 든 역경이 있었고, 그 역경을 이겨낸 역사가 있다. 그 역사에는,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개인들이 있다. 그걸 아는 청년이 있다는 것 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큰 힘이고 희망이다. 

청년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 4년이라는 귀한 시간을 보내는 대학에 대해, 교육기관 으로 대학의 역할과 그 공간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사회에서 유능한 자리 를 차지하는 것은 단순히 세부적인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에 대한 존엄성, 공 동선의 가치, 미래 세대와 지금 세대를 잇는 유대, 기후 위기 등 지금 세계가 직면한 위기를 보고 이를 개선할 수 있는 문제의식을 길러주는 일, 국가와 역사, 개인과 공 공의 가치를 새롭게 하는 일이 고등교육기관으로서 대학교육이 지향해야 할 방향 성이자 비전이다. 소설가의 한 문장과 다친 몸으로 그라운드를 누비던 한 선수의 신 비로운 구절 하나를 나누면서, 이번 학기 마지막 학보를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마무 리하고자 한다.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 더 낫게 내일을 일구는 일에 헌신하는 우리들. 미국의 저널리스트 스트로홀린은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는 죽임(killing)으로 시작하지 않았다. 홀로코스트는 말(words)로 시작했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 지면에서 우리가 나눈 말이 죽임보다 상생의 내일을 향하는 이야기가 되 었으리라 믿는다. 이 지면을 빌어, 공공의 가치를 위해 자신의 많은 것을 내주고 헌 신한 우리 기자들에게 경이(驚異)를 표한다. 

 

·정은귀(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외대학보 편집인 겸 주간)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추천 0 비추천 0
유료기사 결제하기 무통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할 금액은 입니다.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관련뉴스 - 관련뉴스가 없습니다.
소외받는 이들을 위해 (2022-12-07 12:00:00)
소외받는 이들을 위해 (2022-12-07 12:00:00)

가장 많이 본 뉴스

기획 심층 국제 사회 학술

포토뉴스 더보기

기부뉴스 더보기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현재접속자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