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1960년 11월에 발표된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첫 문장이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해방 후 만주에서 귀국한 대학생 으로 이념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뇌하던 청년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월북한 아버지로 인해 경찰서에 끌려가 취조와 고문을 당하기도 한 그는 정신적·육체적으로 큰 고통을 받는다. 그 당시는 남북 한의 이념 대립이 만든 불안한 냉전 구도로 인해 민족의 개념이 거의 상실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가 아버지를 찾아 떠난 북한도 고통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는 선택의 기로에서 남한과 북한이 아닌 중립국을 택하기로 마음먹는다. 그가 본 두 사회는 모두 환멸만이 남아 보람 있는 삶을 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중립국 인도로 가는 배에서 마지막 자유의 공간인 푸른 바다, 즉 광장으로 몸을 던진다.
그렇다면 이명준이 찾고자 했지만 찾지 못했고 동시에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상실감의 원인인 광장은 무엇일까.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광장은 다중과 함께하는 사회적 삶을 의미한다. 반대로 밀실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내밀한 개인적 삶이다. 2023년 현재의 사회문제와 정치적 상황은 최인훈의 소설 속에서 형상화 된 광장과 밀 실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현시대의 우리나라 국민들은 밀실에서 의 분노를 광장으로 끌고 나와 공적인 담론으로 전환시키기도 한다. 국가를 향한 개인의 의견이 밀실을 벗어나 광장으로 나올 때 그 파급력은 훨씬 강해진다. 그렇기에 발언의 주체인 개개인에게 요구되는 책임감 또한 한층 무거워진다. 그러나 광장의 영향력은 자칫 왜곡된 군중심리를 폭발하게 하거나 광장을 맹목적인 분노 증폭의 현장으로 변질시키기 쉽다.
밀실은 여전히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는 내밀한 공간으로 남아있다. 사람들은 밀실에서의 사유를 통해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자유로운 상상과 성찰 속에서 내면을 한층 깊고 아름답게 갈무리 한다. 다만 밀실은 그 폐쇄성 때문에 때론 정당하지 않은 일들까지 주관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 개인적 차원의 밀실 속 삶이 신독에 의해 꾸려지지 못할 경우 그것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에 대한 △복수△배신△원한을 도모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국민들이 광장에서 물살이 되고 불길이 되는 시간은 짧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만의 밀실에서 조용히 하루를 되돌아보며 편안한 휴식을 취할 권리가 있다. 침대에 누워 음악을 듣거나 지인과 전화를 하고 읽지 못한 책들을 오랜만에 들춰보며 삶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평범한 마음의 결을 가진 국민들을 자꾸만 광장으로 불러내는 사회는 광장이 갖는 오늘날의 실천적 함 의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있는 사회가 아닐 수 없다. 광장의 삶과 밀실의 삶의 균형을 결단과 되새김이 필요한 때다.
고서연 기자 06syko@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