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소희’와‘ 다음 대학’을 지키기 위해

등록일 2023년03월02일 18시50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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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화고 여고생 소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다음 소희>는 콜센터 직원들의 충격적인 현실을 보여주며 죽음을 부르는 현장실습의 문제를 다룬다. 노동현장에서 죽어나가는 숫자가 너무 많은 우리 사회에서, 이 영화는 사회 전체가 죽음에 대해 갖고 있는 불감증을 ‘다음 소희’라는 선명한 제목으로 고발한다. 즉, 소희의 죽음은 과거형이자 현재진행형이며 앞으로도 계속 또 다른 소희가 있을 거라는 얘기다. 그 불길한 예감은 부당한 노동 현장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교육과 노동 현장 어디에도 이런 예감이 작동 중이다. 학교에도 군대에도 다양한 방식의 폭력이 이어져 우리의 무수한 소희들이 오늘도 죽어가고 있고, 우리는 우리의 소희‘들’과 원치 않는 작별을 계속한다. 

 

억울한 일을 겪고도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내몰리는 일은 최근 불거진 학교 폭력 문제에도 비슷하게 진행된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폭력으로 삶의 벼랑에 내몰리지만, 가해자는 별 반성 없이 부모의 힘과 권력, 법망을 이용한 교묘한 회피 전략으로 인해 끝까지 살아남는다. 심지어 좋은 대학에 가 행복하게 미래를 설계한다. 법적 처벌을 면하기 위해 자녀의 반성을 막는 부모도 있다고 학폭을 다룬 교사는 뼈아프게 고백한다. 가해자는 최고 대학을 나와서 다시 또 부모가 걸은 길 위에 서 법적 권력을 얻고 사람들의 미래를 좌우하는 일을 하면서 불감증으로 온갖 횡포를 저지를 것이다. 

 

‘다음 소희’가 우리 사회의 암울한 현재를 전망한다면, ‘다음 대학’도 조금 다른 방식이지만 비슷한 위기의식을 우리에게 상기한다. 벚꽃 피는 순서로 대학이 망할 것 이라는 지방대의 자조 섞인 우려는 많은 대학에서 정원 미달 학과가 속출하는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서울과 경기도에 위치하고 있는 우리 학교가 벚꽃엔딩의 위기에서 멀다고 마음 놓기에는 현실이 녹록치 않다. 당장 양 캠퍼스 유사 학과 통폐합 후 에 확보된 정원 활용 방안 논의만 보더라도 새로 만들어진 학과가 후하게 배정되는 정원으로 입결을 떨어뜨리게 되지 않을까, 혹은 새로운 유사 학과를 낳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들이 생겨나고 있다. 변화를 위한 개혁이 혹시나 섣부른 마음으로 대학의 위기를 앞당겨 자초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잊어서는 안되는 이유다. 

 

여러 가지로 암울한 전망이 우세한 시기에 새 학기를 맞으며 ‘다음 소희’와 ‘다음 대학’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을 생각해 본다. 구성원이 죽어가는 현장은 그곳이 교육 현장이든, 노동 현장이든, 그 어디든 건강하지 않다. 대학은 학생과 교직원이 건강하게 함께 미래를 설계하면서 동시에 지금 현재를 기쁘게 살아내야 할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의를 내세운 어떤 행로도 구성원들이 다치지 않게 조심스레 만들어야 한다. 우리 학생들은 어디서든 현재를 더 낫게 만들려고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고, 교직원들도 마찬가지다. 학교의 열악한 조건 속에서 이 공간을 더 낫게 만 들려고 최선을 다하는 구성원들이 참 많다는 걸 학보사 주간을 하면서 새삼스레 깨 닫는데, 이런 열정을 잘 살려내는 것이 한국외국어대학교가 ‘다음 대학’이 되지 않는 방법이 되겠다. 

 

대학이란 무엇인가. 대학은 한 사회의 고등교육기관이다. 지속가능한 사회의 핵심 가치를 대학이 계속 지탱하고 있는가는 이 변화의 물결 속에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문제다. 최근 한 공부모임에서 자신이 가르치는 과목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자기 전공 분야의 전통을 고수하는 노력과, 미래적 가치를 중심으로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힘을 팽팽히 겨루며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시를 쓰고 번역하 고 연구하는 나는 내심, 세상 모든 게 망해도 시는 살아서 무언가를 주리라는 믿음이 있다. AI가 아무리 발달해도 시 번역은 내 손과 해석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는 나로서도 변화하는 시대의 물결을 들여다 볼 겸, 이번 학기에는 사람의 번역과 기계 번역을 함께 교육현장에서 실험해 볼 계획이다. ‘다음 대학’을 지켜내려 는 구성원들의 노력은 잘 쓰지 않던 근육을 쓰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대학의 미래 를 결정하는 개혁이 당장 눈앞에 근사해 보이는 이익 구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생명의 선순환을 지지하는 가치를 되묻고 이끄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를, 그래서 공동체에 희망을 주는 변화를 끌어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정은귀(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외대학보 편집인 겸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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