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타 뮐러’(Herta Müller) (이하 뮐러)는 루마니아 출신의 독일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독일계 소수민족 가정에서 성장했다. 루마니아 독 재정권의 횡포와 나치의 몰락이란 혼란스러운 상황에 서 자라난 뮐러는 차우셰스쿠(Ceausescu)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젊은 독일어권 작가 모임에 참여하면서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뮐러는 늘 독재 정부의 강도 높은 검열에 시달려야 만 했다. 1982년 첫 단편집 ‘저지대’로 등단했으나 정부의 검열 아래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쳤다. 이후 1984년 책의 미검열판이 독일로 수출되면서 독창적이고도 기이한 아름다움을 지닌 이야기로 유럽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후 뮐러는 자신의 책을 금서 조치한 루마니아를 떠나 독일로 망명했지만 독일과 루마니아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 다만 그녀는 이를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작품으로 승화시키는데 ‘초록 자두 의 땅’을 비롯한 대다수 작품에서 차우셰스쿠 독재 정권의 탄압과 그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청년들의 모습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정부의 탄압 속에서 출간과 재출간을 거친 ‘저지대’는 뮐러가 태어나고 자란 루마니아 바나트(Banat)의 풍경을 몽환적으로 담아냈다. 책은 검열로 인해 삭제됐던 ‘그 당시 5월에는’과 ‘잉게’를 비롯한 4개의 편이 포함된 총 19개의 이야기로 구성됐다. 책 속엔 어린 소녀의 시선에서 바라본 소수민족의 황폐한 삶과 그 삶을 둘러 싼 공포와 공허함이 담겨있다. 이야기의 배경은 루마니아의 독재 아래에 있는 슈바벤(Schwaben) 마을이다. 병든 가축과 어두운 늪지대에서 말라버린 식물들은 음습한 삶의 풍경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가난과 폭력이 팽배한 삶, 그 삶의 저지대로 떠밀린 마을 사람들에겐 두려움과 무력감의 그림자가 깃들어있다. 주인공 소녀의 가족들 또한 술과 폭력에 절어진 채 소녀를 옥죄는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가족과 마을로부터의 해방을 찾던 소녀는 꿈과 자연의 세계로 간접적인 도피를 선택한다.
‘저지대’는 부서지리만큼 위태로웠던 뮐러의 유년 시절을 어린 소녀에게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사실적인 묘사와 대비되는 수려한 문체와 시적 표현은 각각의 명암을 더 뚜렷하게 보여준다. 특 별한 줄거리는 없지만 책의 모든 곳에서 뮐러와 어린 소녀는 독자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외치고 있다. 외침의 대상은 실존 그 자체다. 이러한 삶이 있었다는 것. 그럼에도 이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 말이다. 우리의 삶은 처절하지만 그 자체로 아름답다. 삶의 기복에 지쳤다면 삶이 가진 양립성에 대해 담담히 이야기하는 뮐러의 글을 읽어보기 바란다.
한 비 기자 04hanbi@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