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강을 하고 한 달이 지났다. 개강 직전 대학에서 강의하는 이들, 특히 글을 쓰는 인문학 관련 교수들의 화두는 단연 챗GPT였다. 어떤 질문을 던지면 매우 빠른 속도로 그럴싸한 답을 만들어내는 챗GPT. 출시되자마자 100만 사용자를 돌파했다는데, 일반적인 정보성 답변은 물론, 인간 심리를 관통하는 답변까지 내놓는다니 놀랍다. 챗GPT가 시도 쓴다며 한 친구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사춘기로 방황하는 딸에게 줄 시를 영어로 써달라고 부탁하니 챗GPT가 멋지게 써주었단다, 시를 평생 공부한 인간-친구보다 챗GPT가 더 나은 것 아닌가. 챗GPT의 시는 평범했지만 그때부터 챗 GPT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진 것 또한 사실이다.
챗GPT에서 챗(Chat)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인공지능(AI)이란 의미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GPT다. GPT는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의 약자로, 미리 훈련된 생성 변환기라는 뜻. 오픈AI가 개발한 언어모델의 일종이다. 여기서 언어 모델은 영어, 한국어 등의 언어 각각을 말하기보다, 한 단어가 나오면 그 다음 무슨 단어가 나올지 단어의 배열을 통계로 예측하는 모델을 뜻한다. 그래서 챗GPT의 작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통계와 확률이다. 주어진 데이터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챗GPT의 최고 장점은 어떤 질문을 주더라도 거뜬히 답을 만든다는 점이다. 그것도 아주 빨리. 그럴싸하게.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 챗GPT의 말을 그대로 믿으면 절대 안 된다. 통계와 확률에 기반하여 답을 조립하므로 정보가 적은 분야는 대답이 형편없다. 영어보다 한국어에 기반한 질문에서 엉터리 답이 많이 나오는 것도 확보된 정보가 적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적은 정보량으로는 미리 훈련된 생성변화기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통계를 적절히 조합하여 지식과 명제를 만드는 AI는 그러므로 통계적으로 입력되지 않은 분야는 고장 난 라디오처럼 삐걱댄다. 그럴싸하게 조합된 이야기는 얼핏 들으면 맞는 것 같지만 너무 많은 구멍과 오류가 있다. 유명한 문학작품만 보더라도 주인공과 줄거리가 다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챗GPT는 언어별, 문화별로 근본적인 불평등을 노정하고 출발했는데, 이용자가 많아져 유료화 된다면 그 불평등은 더욱 커질 것이다.
하지만 몇 가지 단점만 부각하여 챗GPT를 이용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과거 역사를 더듬어 보면 혁명에 버금가는 기술의 발전이 있을 때 과격한 거부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를 현명하게 이용하는 것이 새로운 변화와 질서를 낳았 다. 우리 또한 급격히 변하는 AI시대에 인간 능력에 대한 자괴감이나 거부보다는 지혜로운 대처 방식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한 몫은 아무래도 질문하는 인간에 있겠다. 질문하는 인간, 호모 콰렌스 (Homo quaerens)는 슬기로운 인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에 비해 생소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맞이할 AI시대에 점점 더 중요한 개념이 될 것이다. 한 개념이 될 것이다. 축적된 통계 안에서 지식을 구현하는 챗GPT는 질문자의 질문 방식에 따라 확연히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챗GPT와의 대화는 선문답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 대화가 성공하려면 최대한 정교하고 정확한 질문을 해야 한다. 주어지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잘 정리하는 것만 강조하는 지금의 대학교육에서는 질문하는 인간은 길러지지 않는다. 앞으로는 기능적으로 정보를 잘 모으고 정리하고 축적하는 능력 외에 잘 질문하는 인간을 키워나가야 한다.
질문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질문하는 인간을 키우는 교육은 열린 시선을 키워주는 교육이다. 좋은 질문은 좋은 대화를 낳는데, 좋은 질문을 하려면 질문자가 맥락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질문자나 대답자 모두가 성장하는 질문이 가장 좋은 질문일 것인데, 챗GPT와의 대화에서 서로가 얼마나 성장할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하나는 분명하다. 잘 질문하지 않으면 우리는 똑똑해 보이는 낯 두꺼운 챗GPT 앞에서 형편없는 인간으로 전락할 거라는 것. 질문하는 인간을 기르려면 교육의 장에서 많이 읽고 많이 쓰게 해야 한다. 경험을 글로 반추하는 일, 글을 읽고 자기 나름으로 정리하고 거기서 적절한 질문을 만드는 능력은 쉽게 길러지지 않는다. 그 훈련은 지식과 정보를 처리하는 훈련에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하다. 우리 대학교육이 잘 질문하는 인간을 기르고 있는지, 혹시 그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는지 돌아볼 때다.
·정은귀(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외대학보 편집인 겸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