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 중지! 판단 중지!

등록일 2023년06월07일 01시25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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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대학보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옷이 무거웠는데 날씨가 점점 따듯해지더니 벌써 반팔 차림이다. 한 학기가 끝나간다. 수개월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이젠 학교에서 가장 친숙한 사람들이 됐다. 신기한 일이다. 지난해 말엔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기분이 괜히 텁텁하고 개운하지 않았다. 어떤 일에서 떨쳐 나오지 못한 듯한 불안감에 젖어 어디로든 뻗쳐 나가야 했다. 이번 학기는 바빠 미칠 지경으로 날 몰아가고 싶었다. 자취방에서 혼자 쭈그려 있기보다는 세상과의 창구가 필요했다. 그렇게 외대학보에 지원했다. 

 

집단은 목적성을 지닌다. 사람들이 목적 없이 모이진 않는다. △국가△사회△학교 그리고 학보도 마찬가지다. 방중교육은 사실 잘 와닿지 않았다. 신문이 어떻게 구성되고 리드와 단신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말들이 전부 피상적으로 들릴 뿐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도 많아 이름 외우기가 벅찼고 식사할 땐 다들 말이 없어 어색함에 질색팔색했다. 신문도 사람들도 가까워지게 된 계기는 당연히 마감이었다. 수습신문부터 마지막 마감까지 총 7번의 마감을 하며 피곤에 찌든 모습도 보고 한번 마감을 할 때마다 △저녁△야식△편의점 음식△아침△점심을 함께 먹다보니 어느새 서로가 편해졌다. 외대학보 스타일이란 것도 점차 익숙해졌다. △와 ◆같은 기호들도 친숙해졌고 외대학보 특유의 맞춤법과 기사 문단의 구조에 스스로가 길들어가고 있음을 평소 과제나 글쓰기를 하면서 느껴 소름이 돋기도 했다. 

 

이번 학기 내 마지막 기사가 커버스토리로 올라간다는 편집장의 말을 듣자 괜히 오싹 해졌다. 책임감이 낳은 불안감이었을 것이다. 양 캠퍼스를 동분서주 발발대며 취재해야 할 필요를 실감했다. 학교를 다니며 처음으로 글로벌캠퍼스에 방문했다. 얼마나 크던지 크기가 작아 공간절약이 필수인 설캠에선 상상치도 못한 구조물 배치가 많았다. △건국대학교 일감호 부럽지 않은 명수당△옛 국가의 비석 같던 ‘정심대도’△조화롭게 식재된 조경수들로 이뤄진 산책로 덕분에 땡볕에 돌아다니면서도 덥고 찝찝하다는 기분을 잘 느끼지 못했다. 특히 정심대도를 비롯한 비석이 학교에 정말 많았다. ‘외국어’대학교 아니랄까 봐 우리학교 모토인 ‘진리, 창조, 평화’가 각국의 언어들로 적힌 비석도 있었고 해외의 여러 명시들을 적어둔 비석들도 있었다. 그 중에 정말 마음에 드는 시를 발견했다. 미국 시인 월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의 ‘최고의 허구를 위한 원고’였다. “그대는 다시금 순수한 자가 되어 순수한 눈으로 태양을 다시 바라보아야 하며 태양의 관념 안에서 태양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난 무엇에 갇히고 붙잡혀 살았던가를 고민해 보게 된다. ‘나’라는 자아에 갇힌 채 현실을 직시한 적이 있었는지를 고민하며 그동안의 학보 생활을 되돌아본다. 기사를 쓰는 모든 과정은 사실에 대한 일종의 탐구 과정이었다. 하나의 통계나 인터뷰를 제시하더라도 그에 대한 사실관계가 뒷받침됐는가를 항상 확인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을 잠시 내려둬야 한다. 학보에서 얻은 것은 사람들과 돌아오지 못할 추억뿐만이 아니었다. 독단의 늪에 대한 판단중지. 자폐적이던 내 세상에 창구를 얻었다. 뒷담 면은 외대학보 독자들보다는 미래의 외대학보 기자들이 선배 기수들은 뒷담 면을 어떻게 썼을까하고 더 많이 들여다 볼 것 같다. 만일 그들이 이 글을 읽고 후배 기자들이 학보를 하면서 무언가를 얻어갈 수 있길 바랐던 사람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면 부관참시 당해 부끄러우면서도 뿌듯할 듯하다. 

김상헌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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