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는 화가 ‘찰스 스트릭랜드(이하 스트릭랜드)’에 대한 장편소설이다. 사후 재평가된 스트릭랜드라는 화가의 인생이 미화되고 있다고 느낀 ‘나’는 자신이 경험한 스트릭랜드의 모습을 기록하 기 위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젊은 문인이던 ‘나’는 런던의 사교계에서 문학가들과 어울리던 스트릭랜드 부인과 친분을 맺고 그녀가 초대한 저녁식사에서 스트릭랜드를 처음 마주한다. ‘나’가 본 그는 예술과는 거리가 먼 점잖은 중년의 금융 중개인이었다. 얼마 후 ‘나’ 는 스트릭랜드 부인에게서 파리로 도망친 그를 다시 돌아오도록 설득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스트릭랜드는 파리의 좁은 호텔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었고 화가가 되기 위해 파리에 왔다고 이야기한다. 5년 후 ‘나’는 파리에 체류하게 되고 친구인 삼류 화가 ‘더크 스 트로브(이하 스트로브)’를 통해 스트릭랜드와 다시 만나게 된다. 같 은 해 겨울 스트릭랜드는 병을 앓게 되고 스트로브는 그를 자신의 집에 데려가 간호한다. 스트로브의 부인은 그에게 연정을 품고 스트로브를 버리고 스트릭랜드와 떠난다. 하지만 이내 스트로브 부인은 스트릭랜드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깨닫고 상심을 느껴 자살한다. 얼마 후 ‘나’를 만난 스트릭랜드는 아무런 죄책감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스트릭랜드에겐 △명예△부△성욕△죽음 등 세속적인 것들은 중요하지 않고 다만 그의 마음속에 끓어오르고 있는 무언가를 표현해내는 것만이 의미가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 후로 ‘나’는 스트릭랜드를 만나지 못하지만 그와 만났던 사람들로부터 스트릭랜드가 남태평양 타히티 섬에서 보낸 여생을 전해 듣는다. 스트릭랜드는 문명에서 벗어난 타히티 섬에서 원주민 여인과 가정을 꾸려 한센병에 걸려 죽기 전까지 그의 예술세계를 표현하려 했다. 그는 병세가 짙어진 상태에서도 최후의 걸작을 집 벽면에 남긴 채 사망했다.
세간에선 ‘사람 같지도 않다’나 ‘금수만도 못한 놈’ 같이 행실이 좋지 못한 사람을 사람 미만의 것으로 격하시키곤 한다. 비통용적인 것은 우리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사회화에서 어긋난 것으로서 범죄나 부도덕함으로 간주된다. 사회적 틀에 비춰 보자면 ‘달과 6펜스’의 찰스 스트릭랜드는 비양심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이다. 그는 자신의 부인과 자식들을 버리고 도망쳤으며 다른 이의 가정마저 파탄 냈음에도 아무런 죄책감을 갖지 않는 ‘사람 같지도 않고 금수 만도 못한’ 인간이다. 그러나 그는 세속적인 가치엔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세계를 갖고 있다. 바로 예술을 향한 집념이다.
우린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하며 산다. 모든 이들은 저마다 다른 가치를 지니지만 사회에 속해있는 이상 그 사회의 가치를 필연적으로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가치가 과연 절대적인 것인지 재고해 봐야 한다. 우리는 사회의 특혜를 받았기에 그 책임을 지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책임은 탄생과 함께 강제적으로 부여받은 것이지 자의적으로 수락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자신만의 가치로 사회의 틀에서 벗어남으로써 수반된 불편을 감수한 찰스 스트릭랜드를 비난할 마땅한 근거가 있을지 의문이 든다. 우린 사회에서 살아가기에 그 사회의 가치를 따르지만 때론 무반성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며 절대적으로 따른다. 물론 사회의 가치에 만족하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만이 존재한다면 이는 무의미한 논의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그러한 이들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사상은 무한하다. 사회와 다른 가치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마주했을 때 그들에게 어떤 잣대를 들이밀어야 정당한 것인지 우리 자신을 보며 고민해 봐야 한다.
김상헌 기자 06heon@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