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인가. 과연 나라는 사람을 이름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흥미로운 질문이었다. 불교의 관점에서 사람은 연기적으로 상호의존 하는 여러 요소들의 일시적인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색수상행식 (色受想行識)이라는 오온(五蘊)이 32개의 장기와 개체를 구성한다. 그렇기에 정신적 요소와 물질적 요소가 모두 찰나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멸을 거듭한다. 이 흐름은 단절도 아니고 연속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폭풍과 바람으로 적절한 비유를 들 수 있다. 폭풍과 바람은 예측할 수 없는 흐름으로 진행되기에 알 길이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라는 사람 또한 불안정한 흐름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또한 나라는 사람은 주체가 아니다. 시각도 보이는 대상이 있고 내게 볼 수 있는 기능이 있기에 당연하게 보이는 것이다. 모든 조건이 충족될 때 하나의 결과가 생기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 석자로 자신을 소개하며 규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통념상의 사회학적 관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데 이름은 나를 실체적이고 영속적인 존재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불교에서 인간이 연기적 요소들의 집합체이며 윤회를 거듭한다고 말한다. 윤회의 메커니즘은 흔히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로 정의되곤 한다. 사람은 자신의 무지함을 통해 생각하고 이 생각은 행동으로 이어지며 행동은 경향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경향성은 습관을 통해 △마음△미각△시각△청각△촉각△후각이라는 여섯 가지의 감각기관이 접촉하는 대상에 대해 애착 혹은 증오를 취하고 버리는 것으로 이어지며 사람이라는 개체가 형성된다. 이러한 개체는 다시 태어나고 늙어 죽게 되며 △괴로움△비탄△슬픔이라는 반복적인 순환을 하게 된다. 내생의 ‘나’는 전생의 ‘나’가 가졌던 몸과 마음이 의식의 흐름을 따라 또 다른 몸과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마치 씨앗이 열매를 맺고 열매를 먹고 난 뒤 다시 씨앗을 심으면 열매가 되는 과정처럼 여기서 태어난 사람은 여기서 죽고 다른 곳에서 태어난 사람은 다른 곳에서 죽는 것이다. 즉 모든 대상은 이전 행위의 결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감각과 접촉하는 대상으로부터 즐거움을 얻고자 하고 집착하면서 욕망을 따라 △괴로움△비탄△슬픔의 감정으로 이어진다. 현명한 사람은 감각과 대상을 즐거워하지 않고 애착 하지 않는다. 불교에서 열반과 즐거움은 괴로움의 부재다. 산스크리 트어 ‘kala’는 시간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지만 죽음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 시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소멸시키기에 함축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해석되곤 한다.
우리의 몸은 소중하다. 상처에 약을 바르고 보살피는 것과 같아 덧나지 않고 아문다. 이러한 ‘나’는 전생의 선 혹은 악의 행동과 습관의 결과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좌절할 필요는 없다. 지금의 고통에 지나지 않고 미래의 고통이 생겨나지 않도록 수행하고 닦아야 자신을 알 수 있고 성불해야 열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성민욱 기자 07minwook@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