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휩쓴 이슈가 있다. 바로 혐오에 관한 논쟁이다. 혐오는 대체로 개인을 Δ계층Δ성별Δ세대 등으로 집단화시켜 타인을 편향적으로 바라보는 행위를 수반한다. 이와같은 혐오는 윤리적으로 옳지 않지만 어떤 이들은 한 집단에 대해 편향적인 사고관을 갖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은 어떠한 집단에 대해 선입견을 품지 않고 긴 시간에 걸쳐 통찰하는 것이 인간의 생존에 불리하다고 주장한다. 확실히 야생에선 타 집단에 대한 판단을 최대한 빠르게 내리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개개인 모두와 깊은 관계를 갖고 통찰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소모하고 시간을 투자해 타인을 이해해 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바쁜 일생을 보내는 현대인에게 무리한 요구일지 모른다.
타자 집단에 대한 혐오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존재해왔다. 최근엔 각종 편견이 많이 사라졌다곤 하지만 역사적으로 수천 년간 성 소수자들은 배척의 대상이었고 약 100년 전엔 극단적 민족주의인 파시즘(Fascism)이 유행하기도 했다. 최근 일어난 이스라엘 사이의 무력 분쟁도 앞서 말했던 타자 집단에 대한 혐오의 연장선일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혐오가 더욱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던 이유는 아마 같은 국가의 국민들 사이에 역사적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분열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예전과 다르게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에 접속하기만 하면 자신과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손쉽게 만날 수 있게 됐다. 이렇다 보니 우리 사회의 각 집단과 계층은 자정작용을 잃어버리고 서로에게 날이 선 송곳을 겨누게 된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여타 다른 재난 영화가 그렇듯 현대사회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이 영화 속 서울은 지진으로 인해 ‘황궁’ 아파트를 제외한 모든 시설이 붕괴한 상태다. 이런 와중 서울에서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황궁 아파트의 주민들은 그들이 선택받았다는 듯이 행동하며 배타성을 보인다. 또한 그들이 광기와 오만에 가득 차 지진으로 인해 집을 잃은 다른 아파트 주민들을 배척하는 모습이 영화가 우리 사회를 향해 신랄한 비판과 풍자다. 이 영화는 타인을 배척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유려하게 그려내고 있다. 게다가 근래 우리나라 영화에선 볼 수 없었던 세련된 연출과 화면의 색감으로 영화 관객에게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해 영화의 주제 의식에 순식간에 빠져들도록 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영화의 주제 의식인 휴머니즘을 강조하기 위해 영화 말미에 서로를 돕고 사는 지진 생존자들을 보여줬지만 분량이 짧았고 급작스럽게 내용을 전개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또한 막상 영화의 핵심적인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부분을 진부하게 연출했고 이것이 초중반에 보여줬던 수려한 연출과 대비돼 주제의식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근래 작품성과 흥행 모두 부진했던 우리나라 영화에 조금이나마 활기를 불어넣은 수작임은 틀림없다. 혐오와 갈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권하고 싶다.
김도현 기자 07dohyun@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