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도의 시간

등록일 2024년05월29일 23시50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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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긴 글을 적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이 글을 적으면서도 뒤에 올 문장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란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어렸을 적엔 신문 속에 있는 긴 기사들을 보고 이유 없는 경외심이 생겼다. 그런데 기사는 단순히 긴 글이 아니었다. 사건에 대해 주체적인 관심과 상황을 개선하고 싶다는 욕심을 가진 기자가 자신이 쓴 기사의 여파를 숙고한 채 써 내려간 글이 기사인 것이다. 그래서 더 고민하고 망설이게 되는 것이 기자로서 잡게되는 펜이다. 

 

기자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기사를 써야 하는지를 여전히 잘 모르지만 외대학보에 지원할 당시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학내 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갖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지만 기자가 고려해야 할 것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아무것도 모르던 난 외대학보에서 △기획기사△사회문화기사△심층기사△영화칼럼△학술기사를 작성하며 조금씩 배워갔고 이젠 학내 문제에 대한 좋은 기사를 어떻게 작성할지 고민하는 내 작은 발전이 스스로 뿌듯하다. 

 

학보사실 한켠엔 선배들이 발행한 오래된 신문들이 겹겹이 쌓여있다. 빛이 바래서 황토빛을 띄는 신문들은 이곳의 공기를 탁하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치우지 못하는 이유는 선배들이 치열하게 고민한 시간들이기 때문이다. 그 소중한 시간들 위에 △편집장님△부장님△차장님△동료들의 시간이 더해졌기에 우리가 이곳에서 보낸 시간들의 밀도는 더욱 높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몇 년이 지나도 우리가 학보사실에서 보낸 시간들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늘 사소한 망설임이 많았다. 초등학교 시절 무슨 색을 좋아하냐는 선생님의 질문엔 하루 종일 대답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단호히 선택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미래에 대한 확신도 계획도 부족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렇게 애매모호한 사람인 내가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바로 내가 “단호한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란 것이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든 일에서든 ‘여지’를 남기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이에게 실수할 수 있다. 그랬을 때 그 사람에게 사과하기 위해선 ‘여지’가 필요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약간의 여지가. 그래서 난 그런 조금의 ‘여지’를 남기는 사람이고 싶다. 내게 실수한 누군가가 사과해도 받아줄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다른 사람에게 ‘여지’를 남겨줬으면 좋겠다. 여러분이 준 ‘여지’는 다시 여러분에게 따뜻하게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박진하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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