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은 야구선수였다. 이른바 ‘추강대엽’이라 일컬어지는 우리나라 최고의 타자 △추신수△강정호△이대호△이승엽을 능가하는 야구선수가 되어 우리나라가 더 인정받게 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어린 시절의 나는 매일같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한 친선 경기에서 당한 발목 부상 이후 다시는 전과 같은 기량을 낼 수 없었고 난 순식간에 더그아웃만 지키는 신세로 전락했다. 처음에는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한 나를 다시 기용하지 않는 것이 의아했지만 문득 팀에서 더 이상 날 필요로 하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기량이 떨어진 선수가 설 자리는 없었다. 동료들의 경기를 지켜보는 게 내 역할이 됐고 결국 난 야구선수라는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신발과 보호대를 후배들에게 물려줬지만 꿈을 물려주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가끔씩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방망이를 혼자 허공에다 휘두르곤 했다. 길을 걷고 있지만 머릿속에서는 실점을 막기 위해 몸을 날려 타구를 잡아내고 있었다. 마주 오는 사람을 향해 강속구를 꽂아 삼진을 유도했다.
이후 난 방망이와 글러브 대신 책과 펜을 잡았고 대학에 들어왔다. 하지만 예전의 열정과 패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반짝임 대신 무기력만 남은 눈을 반쯤만 뜨고 꿈도 목표도 없이 학교와 집을 오고 가기만 반복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내게 어느 날 무엇인가가 눈에 들어왔다. TV에서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의 모습이었다. TV를 틀면 언제나 나올 법한 따분한 뉴스였지만 왜인지 난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었다. 파란색 배경의 뉴스룸에서 앵커가 간략히 소식을 전하면 현장에 나가 있는 기자가 이어받아 자세한 내용을 전달했다. 그 모습에 알 수 없는 동경을 느낀 나는 그날부터 기자가 되기 위해 언론계 취업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관련 전공도 아니고 아무런 정보도 없던 내게 ‘외대학보 수습기자 모집’이라는 큼지막한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기자의 꿈을 이루는 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지원서를 작성했다. 서류 전형부터 필기시험과 면접까지 거쳐 수습기자로 들어올 수 있었다. 지금은 어느새 차장이라는 직책을 달고 이런저런 기사를 쓰고 있다.
난 구단의 필요에 따라 꿈을 포기하게 되었다. 현실의 냉정한 이해관계와 그로 인한 좌절은 10대의 소년이 받아들이기엔 꽤나 버거웠다. 20대 청년이 된 지금도 가슴 한 켠에 미련을 가지고 살아간다. △기아 타이거즈의 김도영△롯데 자이언츠의 윤동희△한화 이글스의 문동주 등 2003년생으로 나와 동갑인 선수들이 팀의 주축이 되고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활약할 때면 난 뻐근한 발목을 내려다보며 많은 생각을 한다. 하지만 청년이 된 그 소년은 현실의 벽에게 굴복하는 법을 조금이나마 배웠다. 세상은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지만 가질 수 없다면 가끔은 체념하는 법도 배워야 할 일이다. 지는 법을 알지 못할 때 도전은 무모함이 된다. 그러니 가끔은 패배를 인정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발을 내딛는 건 어떨까.
백승준 기자 08seungjune@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