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 인용 이후 소위 말하는 ‘대권 잠룡’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촉박하게 돌아가는 대선의 시계 속에서 과거부터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어 온 정치인들이 본격적인 대선 행보에 나서고 있다. 그들이 내놓은 공약 하나는 대한민국 전역을 들썩이게 만들고 공식 석상에서의 작은 발언 하나는 모든 신문사들이 앞다퉈 속보로 다룬다.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전국을 뒤덮고 있다. ‘정치’란 단어만 나와도 서로가 얼굴을 붉히게 되는 민감한 시기 속 이재명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대법원의 유죄취지 파기환송 선고는 양 진영 간 정치적 갈등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이른바 진보 진영은 이를 사법부의 공격으로 간주해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을 거론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법부△입법부△행정부 모두가 혼란스러운 이 시기에 ‘난세(亂世)의 형국’이란 단어보다 작금의 상황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비유가 있을까.
정치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민주주의 정체 하에서의 ‘정치행위’는 민의의 총합이 강력한 힘을 만들어 국가의 정책적 결정 방향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게끔 해 국민과 국가를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엮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또한 정치는 복잡하고 어려운 결정이다. 정치는 다른 색깔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각자의 처지에 맞는 꿈과 희망을 줘야 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국민들의 상반된 이해관계를 세심히 조율해나가는 노력도 병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치는 매우 위대한 결정이다. 어느 일방이 상대를 △굴복시키거나△무시하거나△복종시키는 것이 아닌 서로를 동등한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현실정치에서 이런 이상을 실현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앞으로도 힘들 것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최소한 민주주의라는 이념 자체의 핵심인 △대화△양보△이해△존중△타협이란 가치는 지켜져야 한다. 이는 포기하거나 양보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며 반드시 지켜야 할 당위적 원소(元素)이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선(最高善)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을 한번 둘러보라. 이미 양 진영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선을 그었다. 자신과 다른 사고를 하는 사람은 ‘지나가는 행인’이 아니라 자신의 ‘적’이자 ‘정치적 제거 대상’이 됐다. 불통의 대통령에게 거대 야당은 무차별적 탄핵으로 응수했고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던 대통령은 결국 계엄이라는 반헌법적 행위를 자행했다. 탄핵 이후에도 서로는 대화와 타협의 방식은 배제한 채 각자에게 주어진 법적 권한을 마구잡이로 행사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일까지 한 달도 남지 않은 현재 양 진영 선두주자들의 발언에선 ‘국민’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현안 질의나 공약 언급 시엔 항상 “‘국민’이 결정할 일이다” 혹은 “‘국민’의 뜻에 따르겠다”라는 답변이 이어진다. 과연 그들이 얘기하는 국민이란 무엇일까? 과연 자신들과 뜻이 다르고 지지하는 진영이 다른 사람들도 그들이 얘기하는 국민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일까?
앞으로도 이 나라에 발 딛고 살아가야 할 한 명의 국민으로서 생각하건데 애석하게도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은 없다. 이미 모두가 귀를 닫았는데 대화한들 닿을 리가 만무하며 그렇기에 타협은 더욱 요원한 일이다. 서로의 차이를 전제한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민주정치는 지금의 우리나라엔 없다. 어쩌면 그렇기에 나는 민주 사회의 시민으로서 지금 누구보다도 이상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타는 목마름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승원(외대학보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