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칸트는 “당위는 능력을 함축한다”는 명제를 제시한다. 풀이하면 어떠한 행위를 할 의무를 진 자는 반드시 어떠한 행위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명언이 아닐 수가 없다. 자칫 추상적인 답변으로 끝날 수 있는 질문에 대해 인간의 ‘행위 능력’이란 가장 단순하면서도 근원적인 힘을 그 답으로 내세우고 있으니 말이다. 우선 이 고언(古言)에 대한 감탄은 잠시 뒤로하자. 이 문장을 오늘날 우리 사회에 적용해본다면 적어도 정치적인 면에선 그 철학자가 살았던 시대에 18세기의 비해 하나도 발전한 것이 없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해야한다’는 것은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만약 우리가 어떤 것을 할 수 없다면,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할 의무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의 사회 그중에서도 정치와 관련해선 수많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들이 현실을 잠식하고 있다. 트럼프발(發) 관세 문제나 수도권 과밀화 현상 심화 등 삼권 분립의 축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하는 문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오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눈은 ‘분열의 정치’란 세균에 감염되어 도저히 앞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여당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난해 12월 3일의 밤에 있었던 일을 언급하며 이른바 ‘내란’ 세력을 척결하라는 말은 이제 그들의 정체성이 돼버렸다. 관련자들이 모두 구속됐으며 지엄한 법의 저울 앞에까지 올려놓은 상황에서 또다시 법의 심판을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야당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헌정사 초유의 사태를 발생시켰던 비상계엄의 문제를 아직도 인지하지 못하고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가? 아니면 철 지난 이념 논쟁으로 사람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있는가? 초당적 협력으로 국가가 지닌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가기 위해선 이 나라의 수재(秀才)들이 모두 모여도 부족한 상황이다.
개개인이 어떤 동기로 정치에 입문을 하게 됐는지는 묻고 싶지도 않고 궁금하지도 않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그들에겐 국가가 닥친 위기를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다. 오늘날 그들이 그 자리에서 해야할 일은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 누구도 다룰 수 없고 그 누구도 미룰 수 없다. 그러나 작금의 정치인들을 보면 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조차 없는 것 같다.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그들에겐 스스로가 문제 해결을 위한 역량을 기르는 것보다 질의 상대방이 마이크를 잡는 태도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선거 때마다 국민들을 위한 공약이라며 실상은 빈 껍데기다. 시급한 문제가 산재해 있음에도 이들은 나라의 정부 조직 하나가 바뀌는 문제조차도 제대로 된 합의 하나 도출하지 못하고 있다. 관용과 양보의 정치 규범은 또 어디로 간 것인가. 민주주의의 시작인 토론과 협의는 실종되며 서로가 귀를 닫고 있는 모습은 우리 역사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 아닐까 싶다.
오늘날의 정치인들에게 묻고 싶다. 우리의 소중한 한 표를 받아 대의제 민주정치의 산물로 선출된 그들은 과연 소모적 정쟁이 아닌 생산적 합의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당리당락을 위한 희생이 아닌 자신을 뽑아준 국민에 대한 희생을 하고 있는가? ‘능력’이 없는 자들에겐 ‘당위’도 없다. 능력이 없다면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를 다룰 권한도 없어야 한다. 언젠가는 조간신문에서 그들의 지루한 논쟁을 보지 않는 날이 오길 기원해본다.
이승원(외대학보 편집장)